이혼을 하면서 겪은 다양한 어려움 중에 가장 나를 힘들게 하였던 것은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전남편과 내가 경제적 자유를 누릴 만큼 벌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명이 버는 것보단 두 명이 버는 것이 더 여유로웠고 적어도 '돈이 없는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이혼과 동시에 알게 된 나의 희귀병은 두 차례의 뇌 수술을 받아야만 그나마 일반인처럼 살 수 있었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나를 회사에서는 '시한폭탄'으로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을 하다 말고 갑작스레 쓰러진다면 회사도 감당해야 하는 몫이 생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학 때 수술을 받겠다고 했지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회사는 휴직을 권하였고 결국 이혼과 동시에 나 혼자 경제생활을 감당했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무급으로 1년을 쉬게 되었다. 결혼생활동안 모아둔 돈은 이혼하면서 일부 전남편에게 줬고, 나머지 금액으로 돈을 벌 수 없는 1년을 나와 내 딸은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내 이혼으로 인하여 마음까지 상처받았을 딸을 위해서는 아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먹지 못할지언정 딸에게만큼은 뭐든 다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1년은 어찌어찌 버텨왔는데, 한 해를 더 쉴 수는 없었다. 통장의 잔고는 점점 줄어들고 지출해야 하는 비용은 늘어만 갔다. 딸아이가 하고 싶다 말하거나, 배우고 싶은 게 많아졌다. 전남편에게 아이의 양육비를 조정하자는 말을 어렵사리 꺼냈지만, '아이가 배우고 싶다고 다 가르칠 순 없는 거잖아.'며 양육비 조정을 거절했다. 이제 겨우 7살, 아직은 미래를 꿈꾸는 나이고, 의욕도 넘치는 나이이기에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돈이 없어서 해줄 수 없다는 말을, 그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어미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술 이후 떨어진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채 다음 근무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휴직 중 여러 사정으로 본 직장에서 퇴사하였기에 돌아갈 곳이 없어진 나로서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 나이 여자 서른일곱(윤석열나이로), 아무리 경력이 있다 해도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원하는 조건으로는 일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본래 받던 월급보다 현저하게 적은 금액을 주는 곳이지만 '감사합니다.' 하며 입사하여야 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억울한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날 써주는 게 어디냐.'싶어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에 자는 딸의 얼굴을 보고 출근한다. 때로는 아이의 자는 얼굴만 볼 수 있는 시간에 퇴근하기도 한다. 엄마가 아팠기 때문에 온전히 1년은 엄마를 차지할 수 있었던 딸아이는 엄마가 출근하기에 생기는 '엄마부재중'에 적응을 힘들어했다. 7살임에도 애착이 더 생겼고, 주말에 잠깐 편의점을 다녀오는 것도 절대 혼자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또 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배우고 싶다던 피아노, 미술, 수영, 구몬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씩, 태권도는 친정엄마의 양육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일주일에 네 번, 교육비만 지출이 꽤 컸다. 작년 한 해 아랫집에 살고 있는 친정에도 이미 너무 많이 손을 벌렸던 탓에 더 이상 경제적 부담을 친정에 지게 할 수 없었다. 친정 부모님은 내 건강이 먼저라 하시지만 그래도 이미 이혼으로 상처를 준 딸인 나는 그건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 연유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딸아이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뿐이었다.
"세상은 돈이 없으면 살기가 힘들어.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너무 힘들기도 해. 하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어쩌면 돈이 필요한 상황들이 있어. 그렇지만 엄마는 엄마랑, 너를 위해서 몸이 피곤해도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해. 그러니까 OO이도 엄마랑 함께 하고 싶은 매일의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주말에 엄마랑 시간 잔뜩 보내면 어떨까?"
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7살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조금은 벗어나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하면 진심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딸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면서 종종 내게 사랑의 편지를 전하곤 했었다.
나와의 대화 이후 딸은 종종 제 용돈을 모아 감사헌금을 했다. 감사헌금 봉투에 감사한 내용을 써야 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용케 기억하고는 정성 들여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 가는 고사리 손을 보면 울컥 눈물이 난다. 이 아이에게 감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로 다 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다는 것에, 자신도 견뎌야 하는 힘든 상황에도 감사를 잃지 않는다는 것에, 이런 아이가 내 딸인 것에.
때로는 마냥 아이같이 친구들과 놀고 싶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도 하고, 제 요구에 응해주지 않을 때 울음 떼가 늘기도 하는 딸이지만 7살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하기에 존재자체로 힘이 되곤 한다.
하루는 일정에 쫓겨 급한 마음에 소방시설을 보지 못하고 주차를 한 적이 있다. 결국 주변 CCTV에 찍혔고 범칙금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주정차 위반 범칙금 8만 원이었다. 고지서를 들고 한숨을 푹 쉬고 있는데 딸이 물어왔다.
"엄마, 왜 그래?"
"OO아 어떻게 하냐. 엄마가 저번에 소화전을 못 보고 주차를 했는데 그거 잘못한 일이라고 벌금 내라고 하네. 엄마 돈도 없는데..."
"그거 얼만데?"
"8만 원이래. 지금 송금해야겠다. 빨리 내면 벌금도 조금 깎아 준다? 엄마 집에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
은행어플을 접속하여 벌금을 송금하면서 위층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그땐 몰랐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을.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는데 딸아이가 조심스레 뭔가를 내밀었다. 만원이었다. 이게 뭐냐는 눈으로 딸을 보았는데 딸은 미소만 띠었다. 함께 있었던 친정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무심하게 툭,
"OO이 지갑에 들어있던 OO이 전재산이래. 네가 범칙금 때문에 슬퍼하니까 너 올라가고 엄마 줘야 한다며 지갑에서 꺼내더라."
바쁘단 핑계로 사실 주말에도 딸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온전히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었는데, 아이는 내게 자신의 전부를 주었다. 만 원을 들고 서서는 한참을 울었다. 아이의 예쁜 마음이 위로가 되어서, 엄마가 돼서는 진짜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일을 시작하고 직장의 일정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갔던 날이면 "할머니, 나 괜찮아. 엄마 나 잘 때 나갔다가, 잘 때 들어오는 거랑 다르지 않잖아. 할머니랑 자면 되지."라고 말했다던 딸의 마음이 너무 어른스러워서 마음이 무너진 날이 있었다.
고작 만 원. 내게는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마음이 담긴 큰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 마음을 다 갚기에는 부족하니까. 나는 늘 갚지도 못할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