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러 읽기 시작한 문자는 내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공주는 그런 얘기 나한테 안 했어. 나한테는 다음번엔 아빠집에서 하룻밤 같이 자고 더 놀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계속 시간이 왜 빨리 가냐며, 다음에는 또 언제 보는 거냐고. 다음 주에도 보는 거 아니냐고... 그런 얘기만 했어.
(구) 남편이 전해 온 문자는 거짓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공주다. 공주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문자를 읽어 내려가며 매우 혼란스럽고 지금까지 공주가 내게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면접교섭권만 다녀오면 아빠네에서 느꼈던 불편한 마음이나, 아빠의 잘못된 행동, 아빠가 잘 놀아주지 않아서 속상하다는 표현들이 떠오르면서 그 또한 '거짓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아빠에게는 공주가 나한테 와서는 한 달에 한 번만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지만 아빠가 거절했으니 엄마가 말해달라는 부탁을 해왔기 때문에 문자 한 것이었다며 답장을 보내놓고는 제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던 공주의 곁으로 갔다.
"공주야.. 엄마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공주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두 눈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데, 세밀한 부분까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묻기로 했다.
"공주.. 오늘 아빠한테 아빠 한 달에 한 번만 보고 싶다고 얘기 진짜 했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응... 했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공주야. 엄마는 공주가 말했어도, 말하지 못했어도 어떤 것도 상관없어. 말했다고 좋아하고, 그렇지 않다고 좋지 않고 그렇지 않다는 말이야. 그건 공주가 원했던 일이니까 공주가 원한다면 직접 말하기를 바랐던 것뿐이야."
다시 침묵.
"엄마 나 사실.. 말 못 했어."
"근데 왜 엄마한테는 말했다고 했어?"
"그냥 말이 그렇게 나왔어."
그냥 말이 그렇게 나왔다고 하기엔 아이가 집에 와서 했던 말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할머니가 한 달에 한 번만 보는 것은 안된다고 하면서 했다는 말이나, 그 말을 들은 아빠의 표정, 그날의 분위기 등. 아이가 내게 전했던 말들은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상세한 부분이 많았기에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 아이의 말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 인지 판별이 어려웠다.
"할머니가 했다는 말은?"
"그건.. 내가 생각해서 한 말이야."
"그럼 아빠한테 언제 또 보냐고, 집에서 자고 가고 싶다고,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했던 말은?"
"... 내가 그런 말 했어. 아빠한테."
"... 왜? 공주 엄마한테 한 말과 반대되는 말이잖아."
"그렇게 말하면 아빠가 좋아해. 할머니도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러냐면서 웃어."
알 것도 같았다. 7살 아이에겐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딸아이가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신경 쓰였으며, 평소에 잘 웃지 않는 제 아빠가 조금이라도 좋아했으면 좋겠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칭찬받고 예쁨 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모종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스르고 전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주랑 얘기해 봤는데, 공주가 너네 집에 가면 너랑 어머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나를 무섭다고 얘기하거나 더 자주 보고 싶고 자고 가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 그래야 너랑 어머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어머님이 자주 '엄마는 어떠냐?'라고 물어보는데 공주가 눈치가 빤하다 보니 그 물음의 의미를 안 것 같고, 내가 무섭다고 말해야지 뭔가 어머님이랑 네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이 든 것 같다. 아무래도 어리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가 거기까지였던 것 같네. 왜냐면 나한테 와서는 네 안 좋은 이야기들을 했었거든. 공주 말을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믿지 않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 지점이네. 나도 공주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한 것에 매우 당황스럽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부분들이 있지만, 공주 마음에 힘듦이나 어려움이 있으니까 나한테 와서는 이렇게 말하고 너한테는 저렇게 말한 거겠지.
아래층에 친정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데, 어린이집 하원하고 오는 시간이 나의 퇴근 시간보다 이르다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는 시간이 많다. 우리 부모님께 공주는 그저 안쓰러운 손녀이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손녀의 뜻대로 해주시기도 하고, 무섭게 혼내시는 적이 없기에 내 딴에는 그나마 우리 집에서 공주의 단속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내가 나쁜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7세가 된 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의 문제나 자신에게 한 없이 따뜻한 할머니, 할아버지를 향해 예의 없게 행동하는 일들, 위험한 일을 서슴지 않는 일이 많아져 엄격하게 훈육을 했던 적이 있곤 했는데 그것이 독이 된 것인지 엄마가 무서워서 아빠랑 살고 싶다는 말,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가혹하게 들려왔다.
사실 내가 선택한 이혼이기에 내게 가혹한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의 이혼이 아이에게 아픔이 되질 않길 바랐는데, 나도 어렸을 적 겪어보았지만 그런 아픔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가 양 쪽의 부모의 입맛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는 것이.. 아직 고작 7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걸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 더 슬프고 미안했으며 나를 한없는 죄책감으로 내몰았다.
"공주야. 정말 엄마가 무서워서 아빠랑 살고 싶어?"
"아니..."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는지 아이는 울먹이고 있었다. 분명 공주는 제 말 한마디로 어떤 일이 펼쳐졌는지, 엄마는 아빠에게 어떤 사람이 되는지 다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거운 공기와 가라앉은 엄마의 표정만으로도 제 실수를 어느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견뎌야 하는 우리 둘에게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공주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하얀 거짓말도 때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어. 오늘 같은 일이 그런 거야. 공주는 아빠 마음을 배려한다고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아빠는 그 마음을, 그 말을 그대로 믿게 되거든. 그러면 아빠한텐 엄마가 공주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될 거구, 아빠가 공주를 키우겠다고 할 수도 있어. 만약에 공주가 엄마랑 살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면 아빠 마음을 위해서 공주 마음속에 없는 말은 절대로 하면 안 돼. 공주가 어떤 행동을 해도 엄마랑 아빠는 앞으로 함께 살 수 없어. 공주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것이랑은 별개로 엄마랑 아빠는 이제 한 가족이 아니야. 그래서 중간에 있는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주가 엄마랑 아빠 사이를 더 나빠지게 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가 함께 살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엄마, 아빠가 서로를 미워하진 않아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곰곰이 생각하던 공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들의 거짓말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거짓말에 한 번 성공하게 되면 그 거짓말은 습관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전남편과의 이혼을 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그 거짓말에 더 큰 강박이 있기도 하다. 내 딸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말 하나, 내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것이겠지. 공주가 바른 길을 가고, 제 마음을 더 잘 살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