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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독일에서]검표원은 내 신분증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식은 땀 줄줄줄

by 노란대문

도이칠란드 티켓으로 탈 때 주의할 점은 ‘신분증 챙기기’. 여권도 몽땅 다 들고 다니라지만 학생일 땐 학생증, 지금은 비자카드만 보여준다. 여차하면 공보험카드, 그것도 안되면 이름이 적혀있는 은행카드까지. 이 정도로 양손에 카드를 한가득 보여주면 여권이 없어도 통과된다.


그런데 오늘따라 내 앞에 멈춰있는 검표원이 비자카드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왜지? 내가 모르는 법률이 생겼나? 뭔가 달라졌나? 얼굴이 달라 보이나? 이유 없이 그가 내 신분증을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식은땀이 줄줄 난다.


왜 뭐 어쩔까.

눈에 힘을 딱 줘봤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은 역부족이다.




그저 어느 보통날이었다. 항상 타고 다니는 기차였고, 방방곡곡 커버되는 도이칠란드 티켓이 있었다.


도이칠란드 티켓이란?

매달 58유로를 지불하면 고속열차(ic, Ec ICE 등의 고속열차)를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그전에는 시마다 다른 교통권을 사용했기 때문에 어딜 가나 버스표 하나 사는 것도 골치였는데 이제는 모바일로도 결제되고 핸드폰 안의 QR코드로 표 검사를 대신할 수 있다. 다만 사진이 부착된 공식 신분증과 함께 지참해야 한다. 한 달 단위로 계산된다.


갑자기 부산스럽게 나타난 멋들어진 수염의 검표원이 나타났다.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약간의 흥과 함께 곧 표 검사를 할 것이라는 안내를 했다.

"표 검사가 있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부스럭부스럭 거리며 저마다의 표가 여기저기서 뿅뿅 튀어나온다. 카드를 챙기는 사람, 학생증을 꺼내는 청년, 커다랗게 인쇄된 종이를 꺼내는 사람 등등. 나도 익숙하게 QR코드를 준비했다.


이전에 표가 없어서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내리던 사람들에 대한 글(오늘은 만났다. 독일의 암행어사)을 썼었는데, 오늘은 표가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도시-도시를 이동하는 기차 안에는 용인된 표를 지침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멋들어진 콧수염의 검표원은 노상 당케, 당케, 하면서 기분 좋게 사람들 표를 검사하고 있었다. 사실 종종 흥이 있거나, 기분 좋은 검표원들은 제대로 된 공식 신분증까지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냥 표만 보여주면 -오케이, 하고 후딱후딱 넘어가는 것이다. 아마 그런 느낌인 듯하여 멍하니 그의 도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좋네, 너 타이가 멋지네, 여행 가나 봐요! 등등의 스몰톡도 간간이 던져가면서 당케, 당케, 하는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그가 나의 좌석에 거의 근접했을 무렵, 나는 한국인답게- 이미 표가 준비되어 있었고, 당케- 하면서 나를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림잡아 2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는 하지 않았던 문장이 넘어왔다.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 왜냐하면 그 전의 어떤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았고, 그중에서 또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뭐 약간의 싸함이 가라앉는 듯했다. 나는 네 사람이 마주 보는 좌석에 앉아있었는데 앞에 앉은 두 명의 독일 할머니들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검표원과 나 사이를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바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 주변에 온갖 파란 눈의 외국인에게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지만 뭐. 태도도 무례하지 않았고 신분증을 들고 다니는 것이 원래 법률이니 흔쾌히 보여줄 수 있었다.

‘내가 외국인이라서 받는 인종차별일까 흑흑’ 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는 세월에 풍화되었다. 이 정도는 그냥 랜덤으로 찍어서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러려니 싶다. 게다가 활짝 웃는 얼굴이라 그냥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인갑다 싶었다. 그날따라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따질일도 아니었으니 지갑에서 주섬주섬 비자카드를 꺼내 들었다.


"여기요"


이제 그럼, 슬쩍 확인한 뒤 당케-라는 말이 넘어올 차례였다.


"잠시 봐도 될까요?"


그의 손이 신분증을 여 달라는 듯 내밀어졌다.


오!


이제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다들 이 한 편의 짤막한 단막극의 말로가 궁금한 듯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주변에 있는 인원들이 어른들이 많아서 그런지 눈알만 도르륵 도르륵 굴리며 이 재밌는 구경거리를 마음껏 탐닉하고 있었다.


사실 신분증을 요구한다고 해도 사진과 얼굴만 슬쩍 대조하거나 이름이 맞는지만 확인하고 바쁜 걸음을 서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자세하게 본다는 것은 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랄게 없는 나는 기분이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어쩌겠는가. 넘겨줘야지.


부러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왜, 뭐 우 씨. 하는 부라림으로 넘겨줬다. 작은 기선제압이랄까. 그러면서 검표원의 이름을 나도 슬쩍 스캔했다. 그래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꼿꼿한 자세로 내 신분증 돌려받기를 기다리기- 뿐이라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뭐 별 글자가 써 있지도 않은 내 신분증이 오래도록 그의 손 위에 멈춰있었다. 허허, 거기 나와있는 거라곤 이름 석자와 독일에서의 내 등록번호 같은 것들이다. 생년월일 뭐. 그런 공적인 자료들. 아니 왜 안 주지? 고개가 갸웃 해졌다. 그는 다시 한번 내 얼굴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면 이름도 외우겠다 싶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사람들은 이제 수근수근거리기 시작했고 나를 흘끔 곁눈질하며 저들끼리 종알댔다. 뭐 문제가 있나 봐. 저 여자 표가 문제인가 봐. 등등. 소리가 새어 나와 귀에 콕콕 박히기 시작했다. 어느새 검표원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미간을 모은 채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니, 한국처럼 돈과 시간을 들여 찍은 증명사진도 아니고 보정하나 하지 못해 실물 그대로의 증명사진이 박혀있는 비자카드인데. 내가 지금 얼굴이 좀 피곤에 쩌들었기로서니 그렇게 들여다보아야 할 정도인가 싶었다.

이제는 뭐가 문제인지 물어나 보자 싶어서 입을 떼려는 순간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곤니치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뭐래는 거야

"비테?"


외국어에는 독일어로 응수하기. 아니, 이게 무슨 경우 일까. 멀쩡한 독일 비자카드를 보고 내가 모르는 언어로 인사하기 라니. (일본어고 중국어고 하나도 할 줄 모르니 말이다.)


그러자 아저씨는 아쉽다는 듯 다시 카드를 넘겨주며 물었다.

"혹시 어디에서 왔어?"

"한국, 당연히 남한"

그러자 그제야 크하하 웃으면서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곤, 니, 치, 와"

아냐 그거 아니야. 아마 외국어로 인사를 하고 싶은 모양이지. 그러나 이럴 때 대충 받아줄 수는 없지, 그래서 엷게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고개저음을 보고 무언가 확신했는지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잠시만, 나 할 수 있어"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뭔데, 뭐야. 하는 이야기를 뱉었다. 그러자 그 검표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이 분의 고향 언어로 인사할 수 있거든요. 근데 틀렸나 봐요. 잠시만요"

그는 관자놀이에 두 손가락을 올리고 지긋이 또 생각에 잠겼다. 졸지에 그에게 질문을 넘긴 스핑크스 같은 존재가 되어 고뇌에 빠진 콧수염을 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 안뇽! 안룡하-"

"Ja, 안녕하세요"

"맞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어 조금 할 줄 알아요."


오우! 굿굿이라며 엄지손가락 두 개를 척 올려붙여주자 그는 주변 승객을 향해서 여 보라는 듯 내 엄지 싸인을 가리키며 과장되게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박수가 터졌다. 와.. 축하해. 한국말을 조금, 정말 쪼금 하는구나! 그걸로 박수도 받고! 이 사람들은 왜 박수를 치는 걸까.


의아했지만 얼결에 같이 와아- 하면서 박수를 쳐줬다. 내 앞에 앉았던 할머니도 도르륵 도르륵 눈을 굴리는 것을 멈추고 박수를 마저 치더니

"정말 대단해요! 그건 어느 나라말이죠?" 하며 검표원에게 물었다.

"이건, 한국말이에요. 정말 아름답죠. 내가 왕년에 거기를 갔었어요. 일본도 가고요. 아 그래서 헷갈렸네!"

"와! 한국어라니! 너무 멋져요!"

"거긴 맛있는 것들이 무척 많아요, 아 환상적이었어요. 물론 며칠밖에 못 있었지만 기회가 되면 또 갈거에요!"


그렇게 한국어 원어민을 앞에 두고 저들끼리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그 나라 언어가 이쁘다. 배우기가 정말, 정말 어렵다. 단어 음절이 아주 어렵다. 등등의 말이 오고 갔다. 졸지의 그의 외국어를 빛내주기 위한 토템이 되었던 인간은 이제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한국어는 정말 어려워 그렇지 않니?"

이제는 할 일을 마저 하러 갈 예정이었는지 그가 사부작 거리며 짐을 추겨올리면서 대화에 나를 껴주었다.


"어 맞아, 마치 독일어처럼."

"와하하!!!"


사람들이 다들 가을 햇빛에 취한 걸까. 내가 독일인을,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웃게 하다니!

검표원은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윙크를 건네고는 이제 길을 떠났다. 사람들은 심심하던 차에 여운이 남았는지 또 나를 장식품 정도로 여기며 저기 저 사람이 그 한국사람이래, 한국어가 어렵댔더니 독일어처럼 어렵대 하하- 하하! 들었어? 독일어처럼 어렵대! 하하 독일어? 하하- 하며 영원히 되새김질하고 퍼져나가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에 할머니 두 분은 나를 의식하는 듯 안 하는 듯, 큰 소리로


"나는 마늘 들어간 음식도 아주 좋아해. 젓가락질도 할 줄 알아!"

"나는 어제 초밥을 먹었어. 엄청 자주 먹어!"


하며 동양- 문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뽐냈다. 내 친구 누구는 일본에 갔더란다 누구는 '그 한식을 먹었단다' 하는 스몰톡들이 나를 건너서 부유하며 기차 안에 잔잔하게 떠돌았다. 뭐 딱히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또 아니라서 뭐라 말을 얹기도, 안 얹기도 뭐해서 주섬주섬 회사 자료나 슬쩍 살펴보려고 아이패드를 꺼냈더니 또 곁눈질을 하면서 쟤가 뭘 한다, 뭘 본다 하는 소리가 소곤소곤 새어나갔다.


아 연예인의 삶이 이런 걸까. 소곤거리는 소리의 주인공이 되는 삶.

하지만 연예인이 아닌 사람은 에어팟을 끼며 주변 소음으로의 도피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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