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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Aug 27. 2021

흔들리는 카약 속에서

물 비린내가 느껴진거야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갑자기 더위가 끝났다. 8월이면 그래도 아직 한창인데. 아 어느새 8월 말이구나.

 

이제 독일은 비 오고 흐림, 해 안 뜸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힐 것이다. 벌써 부릉부릉 시동 걸듯이 일주일 내내 비 예보가 있다. 급격하게 해가 늘었다가 급격하게 짧아지는 풍경은 몇 년을 살아도 적응이 안된다.


그래도 해가 늘어지는 것을 보면 따뜻함과 젤라또, 여름휴가 같은 것들이 기대되어 들뜨기 마련인데 해가 걸음을 빨리 놀리게 되면 어쩐지 우울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은 다들 조금쯤 해바라기 같아서 해가 떠야 고개를 들고 활기차게 살게 된다. 나는 내가 날씨에 이렇게 좌지우지되는 가벼운 사람인 것을 여기 와서 확연하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나라에 그렇게나 많은 철학자들이 나왔나 보다.

흐릿한 풍경을 보고 있자면 내가 그동안 느끼던 즐거움은 다 무엇인지, 뜨겁던 태양은 다 무엇인지, 헐벗고 즐거워하는 젊은 날의 인상은 다 무엇인지, 그런 생각들이 밀물처럼 켜켜이 밀려 들어온다.


그래서 해가 뜨면 최선을 다해 비타민 D를 섭취하려는 노력이 생긴다. 언어 보담도 이런 생활습관부터 스펀치처럼 받아들인 이방인은 마지막 햇볕을 마주하러 카약을 타러 가기로 했다.


호수, 호수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한국사람인 나에게 굉장히 신기했던 문화였다. 내가 아는 호수는 멀리서 분수가 나오거나 울타리를 쳐놔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 도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들어간다니!


호수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즐기는 모습들도 제각각이다.인공적으로 모래사장을 만든 호수부터 젊은이들의 파티 장소, 가족들의 휴가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곳 등등이 있다. 인공 모래사장을 조성한 곳은 입장료도 따로 받아 관리에 힘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호수에서 수상 스포츠도 즐긴다.

 



처음 호수에 수영을 하러 들어갔을 때, 다섯 걸음 들어가서 '나 호수에 수영하러 왔어요!'하고 수줍게 웃는 사진 하나를 찍은 뒤 얼른 뛰쳐나왔다. 몸에 감겨드는 수초의 느낌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기 때문인데 나오고 뒤돌아보니 아이들은 수초를 친구들에게 집어던지며 장난치고 놀고 있었다. 역시 조기교육의 힘이란.

그렇게 머리까지 담그는 수영은 실패했었다. 지금은 뭐, 여전히 소름 끼쳐하면서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카약은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다. 노 젓는 배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혼자 탈래, 둘이 탈래 하고 묻는 직원에게 처음 타 본다고 이야기하니 '둘이 타라'면서 눈을 찡긋했다. 그러더니 팔 운동을 하라면서 몸소 휘휘 휘둘러보여줬다.

수영은 할 줄 알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고는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래서 야무지게 구명조끼까지 입었다. 하도 꽉 조여놨더니 직원이 보고서는 조금 풀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인용  카약을 골라서 들어 올리는 것부터 물에 띄우는 것, 올라타는 것, 전부 스스로 해야 한다. 직원은 뒤에서 그렇지! 그거야! 하면서 감탄사를 뱉어준다. 역시, 사람 위주의 서비스. 받은 만큼, 혹은 조금 적게 일한다는 이들의 마인드는 볼 때마다 박수가 나온다.


물가를 바라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은 우리가 첨벙거리면서 카약을 물에 띄우는 것을 전부 구경했다. 둘 중에 누가 먼저 올라탈 것인지, 허둥거리고 있자 결국 웃음이 터진다.

"아냐, 더 들어가서 올라타야 해!"

이윽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걸걸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중심을 잡아! 중심을!"

"잡아줘야지. 단단하게!"

용감하게 먼저 올라 탄 내가 비틀거리는 통에 카약이 뒤집힐 듯 흔들거리자 다른 목소리들도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물과 내 몸이 너무나도 가까웠다. 배가 아주 얇았다.


결국엔 둘 다 하반신이 쫄딱 젖은 채로 배에 안착했다. 노를 저어 어이어차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웃음소리와 함께 작은 박수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휘익 거리는 휘파람 소리까지 들렸으면 물속으로 그냥 들어가 버리려고 했는데, 배가 슝슝 나가는 통에 뛰어 들 타이밍을 놓쳤다. 배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내가 간 곳은 Wannsee (반제)라는 호수였다. 엄청나게 큰 호수라서 설핏 보면 바다 같기도 하다. 한쪽에는 인공으로 구성한 드넓은 모래사장이 있고, 다른 쪽은 선박들이 오고 간다. 베를린의 교통권으로 이용할 수 있는 페리도 운영된다.


작은 카약을 몰고 영차영차 호수의 중앙 쪽으로 흘러갔다. 햇살이 눈부시게도 따사로웠고 육지와 멀어지자 배와 물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평화였다. 유난히도 맑은 하늘이 호수에 한가득 있었다. 그렇게 느긋하게 둥둥 떠다니는 우리 옆으로 또 다른 카약이, 카누가, 패들보트가 한가로이 지나갔다.


어느새 카약은 정말로 호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눈앞에 파도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뱃길이었다. 우우웅! 하는 소리 뒤로 엄청난 속도의 모터보트가 지나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재난이 찾아왔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허벅지가 젖어들었다. 물살이 거칠어져 넘실넘실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진짜로 ‘물 들어올때’ 노 저어야 했다. 퍼낼 수도 없고. 큰일이었다.


비명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왼쪽! 왼쪽!

소리를 지르며 흡사 조정 경기에 나간 사람처럼 정신없이 배를 저었다. 아까 내가 '노 젓는 배는 처음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고, 뒷좌석에 탄 친구가 정신을 붙잡고 나를 설득하기 전까지 나는 미친 듯이 왼쪽을 외치며 노를 저었다. 하낫 둘, 하낫 둘도 외쳤다.


"제발 진정해"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까 지나갔던 모터보트보다 더 큰 놈이 저기 멀리서 오고 있었다.

"저거봐!! 저거! 우리 나가야 돼!!"

멧돼지를 본 적 없지만, 만약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우리는 그 배가 직진으로 달리면 마주할 바로 그 길목에 떠 있었다. 이번엔 둘 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하낫-둘, 하낫-둘 하고 힘을 합쳐 노를 저었다. 방향 지시 권력을 넘겨받은 친구가 왼쪽! 오른쪽! 하고 외치는 소리에 따라 정신없이 노를 저었다.


배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조금 다른 길로 틀어서 아슬아슬하게 빗겨 지나갔다. 다시 호수의 외각으로 빠진 후 손을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호수 외각의 육지를 따라 천천히 노를 저어 반납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간신히 육지에 도착해서 후들거리며 내려서는 우리에게 직원이 다가왔다.

"재밌었니?"

둘이 타라고 말해줘서 고마워하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구명조끼를 벗고 보니 등이 온통 땀투성이 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노 젓는 배, 만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제 팔과 손을 잃고 나니 여름을 보낼 준비가 되었다.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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