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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Aug 27. 2021

초가을에 마시는 2500원짜리 한정판 와인

와인 무식자와 함께하는 홀짝홀짝

술, 그 애증의 이름이여. 성인이 된 후 마주한 '자, 한잔 해야지.' 하는 사회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였다.


그것도 참 거절할 수 없는 사람들이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그것을 넘긴다. 개중에는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숟가락으로 식탁을 땅땅 때려댔다는 상사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술을 자꾸 권하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몸에도 안 좋은 이거를 왜 자꾸 죽을 때까지 같이 먹자고 하시는 거죠? 아니 그렇지 않은가, 맛있으면 혼자 먹고 말 것이지, 안 먹겠다는 사람에게 눈치 주고 면박 주고.


"아- 분위기를 좋게 풀어보려고 하는 거지. 다들 그렇게 알딸딸한 상태에서 밑바닥도 보고, 친해지고 어?"


난 단언컨대 다른 사람의 밑바닥을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가 않다. 외면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슬쩍 보이곤 하는데. 내 밑바닥도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그냥 우리 다 같이 적당한 사회적 예의 있는 얼굴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국에 살면서는 알코올을 입에도 안 댔다. 괜히 한잔, 두장 홀짝홀짝 먹기 시작하면 종국에는 우에에엑 하면서 게워 낼 때까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대학 때도 교수님이 '자네는 술을 안 하는가?' 하면서 은근히 주는 눈치에도 '예, 저는 술을 안 마십니다. 짠만하시죠.' 하면서 넘기기 일수였다.


그러더니 아무도 술을 권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는 괜히 홀짝홀짝 홀짜작을 한다.




"독일"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술은 "맥주"다. 물보다 맥주가 싼 나라, 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니 이곳 사람들의 맥주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 특히 한여름이 되면 길 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맥주병을 들고 가면서 하하호호 마시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저기 잔디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고, 학교에서는 축제가 벌어질 때마다 맥주부터 판매한다. 가격은 1유로 정도이니, 한국으로 치차면 1500원 정도에 맥주를 마시는 거다.


맥주집에 가면 1L짜리 맥주도 여기저기 주문이 들어가고, 뒤이어 종업원이 '쿵' 하는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배달해준다. 그것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홀짝 가리며 감자튀김을 집어먹는 사람들.


이렇다 보니 친구들끼리도 '맥주 한잔 하자'하는 말이 'K-밥 먹자'처럼 쓰인다. 자매품으로 '커피 한잔'이 있다. 말만 듣다 보면 나라에서 알코올 향이 짙게 묻어날 것 같은데 의외로 홍대나 신촌의 밤 같은 풍경은 본 적이 거의 없다. 특히 길에서 우에엑-하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고, 어쩌면 굳이 술자리를 찾지 않는 사람이 보는 풍경이라 편협할지도 모르겠다만, 한국에서는 밤만 되면 보는 풍경이었다.


 아무래도 즐겨마시는 술의 도수가 다르다 보니 결과물도 다를 수 있겠다. 그리고 친구에게 슬쩍 물어보니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면서 맥주를 홀짝 거렸다. 그러면서 취하고 싶은 날에는 보드카를 마셔야지. 하하하, 다른 친구도 맞아 맞아, 맥주는 물이지 하하하, 하면서 알딸딸하게 웃었다.




취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의 주량이란 아주 형편없다. 솔직히 진한 보리 맛을 느끼고 싶어서 어쩌다 한잔 하는 것인데 그 수도 일 년에 손에 꼽힐 정도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 모금 정도 마시고 만다. 그 뒤로는 알코올 맛이 확 덮쳐와서 더 이상 맛이가 없다.


그런 알코올 가뭄의 삶을 사는 내가 눈을 반짝이며 구입하는 와인이 있다. 무려 와인!

가격도 착하다, 2500원 정도라고 말했지만 어제 2유로 좀 안 되는 가격에 얼른 집어왔다. 이름하여 Federweßer(페더바이서).

한 해의 가장 처음 수확된 햇 포도로 만다는 와인인데, 탄산이 들어간 청포도 주스와 다를 바가 없다. 도수는 물론 다르지만. 4도-10도 사이이다. 햇과일로 만든 달달한 와인이니 한정판으로 판매된다. 8월 말에서 10월 초에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냉장고 코너에 페더바이서가 한가득 들어오는 것을 보면 비로소 가을 냄새를 맡는다. 이제 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잎이 떨어지면서 시간은 성실하게 흐를 것이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이 와인을 추천받고서는 어떤 와인인지 궁금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무심결에 기울였다.

그리고 줄줄줄 손에 흐르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마침 주변에 있던 직원이 후닥닥 뛰어와서는

"절대로! 절대! 기울이면 안 돼!"

라고 주의를 주었다.


뚜껑을 완전히 닫지 않은 상태로 파는 와인이라서 그렇다. 집으로 사 와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먹기 시작하면 매일같이 조금씩 더 발효되는 와인 맛을 느낄 수 있다. 오래 두면 둘 수록 알코올의 향이 짙어진다. 누구는 사 와서 3일 뒤에서 먹는 게, 누구는 사온 날 바로 먹는 게 취향이라고 한다. 나는 가장 달달할 때 조금 홀짝거리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와인을 사 오면 룸메들과 나눠마시고는 친구가 방문하거나, 다른 친구의 손님이 오면 마음껏 마시라고 내준다. 알코올 맛이 강해지기 전에 후딱 끝내고 새로운 달달함을 즐기기 위해.



아침부터 한가득 비가 내리고 있다.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오는 하루가 될 것 같은데 오늘도 홀짜작 홀짝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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