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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Aug 19. 2021

케챱이 사라집니다. 마요네즈도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어느 날 부턴가 우리 집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부엌에 들어간 마요네즈와 케챱이 쓴 적도 없는데 바닥을 보인다는



독일에는 조금 특이한 집 구성이 있다. 'Wg'라는 것인데 한 집을 여러 명이서 나눠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일반적인 집 구조는 거실을 통해서 각 방으로 갈라지는 것이지 않는가. 근데 여기는 복도를 중심으로 각 방으로 갈라지는 구조가 조금 더 일반적이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개개인이 모여서 사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다.


종종 젊은 청년들이 집세를 좀 아껴보고자 큰 집을 구해서 서너 명이 함께 살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구성원이 나가면 다른 사람을 들이는데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들과 잘 맞을지 결정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집 구하기 전쟁에 들어서게 되면 하나 같이들 이 ‘인터뷰’에 초대받기 위해 내가 얼마나 친절하고 상식적인 사람이며 깨끗한 사람인지를 어필하는데 여념이 없다.


사실상 이 과정은 꼭 필요하다. 파티광인 친구들과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 같은 집에 살게 되면 갈등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인터뷰는 집의 성격을 알려주는 과정이자 들어올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과정이 된다. 한마디로 통과하기가 아주 어렵다.


여차저차 그렇게 여러 명이 살게 되면 자연스레 화장실과 부엌을 공유하게 된다. 이제 여기서 갈등과 평화의 사건이 엄청나게도 많이 일어난다.


특히나 냉장고에서.


보통 '잘 자란'성인들이 모이게 되면 사소하고 가벼운 문제들은 대화로 잘 풀어나갈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사람이 모인 곳이라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다면 이 글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틀림을 용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집단생활의 가장 큰 문제이자 갈등의 종착지는 '내 것도 내 것, 니 것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족속들이다. 한마디로 부엌에 숨어든 쥐 같은 사람들.

               

그 새앙쥐가 우리 집에도 나타났다. 모두와 가족처럼 지내 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공용 공간에서 만나면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허락 없이 남의 물건을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은 아주 교묘하게 시작되어서 '어? 내가 오일을 이만큼이나 썼던가?' 혹은 '내가 소금을 다 먹었었나 보네' 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부엌에서 만난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프라이팬이 달궈지기를

기다리면서 꺼내 든 내 오일은 어제 새로 산 것 같지 않게 꽤나 빈 공간이 많이 보였다.

 

"요즘 정신없이 먹나 봐, 어제 사 온 오일인데 이것 좀 봐. 나 무슨 튀김 귀신이 된 것 같아."     

내 기억으로는 계란 프라이 하나 해 먹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나 오일을 쏟아부었다니.


"엥? 야 나도! 나 분명 어제 파슬리를 사 왔는데 엄청 줄었어!"               

하하 웃으면서 꺼낸이야기에 불이 붙었다. 뭐? 파슬리가 줄었다고? 마침 부엌을 지나가던 다른 친구도 합류했다.      

"나도!! 나도 설탕이 반이나 없어졌어! 뭔가 이상해!"     

          

이상할 노릇이었다. 서로서로 얼굴도 다 아는 사이에, '나 이거 좀 부족해서 조금 사용했어'하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집이었다. 혹은 ‘계란 하나를 빌렸으니 내일 갚겠다, 500g 쌀 하나를 빌려주면 다음에 장 보면서 갚겠다.’ 의 상부상조가 통하는 곳이었다.


요리하다가 보면 내가 다 있다고 생각한 재료가 한 두 개가 없을 때도 있기 마련이지 않나. 그때 남이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야기하고 조금 쓰는 정도는 다들 용인하고 넘어가는데 이 것은 한마디 말도 없이 훔쳐먹은 것이었다.

               

왜 이것을 당당하게 '훔쳤다'라고 표현하냐면, 나를 포함한 두어 명의 친구는 '내가 많이 먹은 것 일수도 있어'라고 생각할 법한 것들이었다면 한 달가량 일 때문에 집을 떠나 있던 친구가 복귀했을 때 그 친구의 마요네즈와 케챱이 정말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케챱 귀신이 생겼니?"               

감자튀김을 오븐에 돌리며 맛나게 먹을 생각에 행복해하던 금발머리가 울상을 하며 물었다.


다들 깜짝 놀라 함께 열어본 그 친구의 식료품 보관함은 정말 난리였다. 마요네즈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오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에 2유로도 안 하는 식료품을 그렇게 훔쳐먹고 싶었을까.      

                    



'우리 집에 식량 도둑이 생겼다'라는 소식을 다른 친구들에게 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의 경험을 나눠주었다.                

파스타 면 훔쳐먹기, 계란 집어서 자기 칸에 넣어놓기, 콜라 훔쳐먹기, 우유 한 모금 남기고 다 먹고 냉장고에 넣기....


그중에 왕중왕을 차지한 사연은  ‘비싼 브랜드의 소스 훔쳐먹고 싼 거로 채우기’ 였다. 이 염치없는 도둑은 자신의 룸메이트가 사다 놓는 두 종류의 소스를 유심히 본 다음 매번 비싼 소스를 집어먹었다. 어느 날 들어 본 소스는 텅 비어있었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소스의 주인은 이것을 따져 물었다.

적반하장으로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며 되려 큰 소리를 내었지만 둘만 사는 집에서 사라진 소스의 행방은 뻔했다. 소스가 혼자 발이 달려 나간게 아닌이상 통할리 없는 변명이었다.


결국 범인은 죄를 자백하고 똑같은 것으로 사다 놓겠다고 했지만, 값싼 소스를 사서 병에 대충 채워 넣은 것이 걸리고 말았다. CSI 요원처럼 쓰레기통부터 소스 옆의 이상한 흔적까지, 결국 채 다 인멸하지 못한 유통기한으로 그 못된 짓이 걸렸다. 이 증거를  하나하나 수집하여 두 번째로 뒷덜미를 잡은 날,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며 속을 끓여야 하나’ 하고 방에 가서 죄 없는 베개를 팍팍 내리쳤다는 이야기. 듣기만 해도 어이없음을 지나 열불이 치밀어 오르는 사건이었다.

              

나는 다른 집에 살 때 밥솥을 부엌에 두고 사용했었다. 그러자 같이 살던 친구 하나가 밥 한 공기를 냉큼 퍼갔다. 그리고는 옆에 새로운 쌀500g 짜리를 하나 사놓고는 '이건 정말 어메이징 한 맛이야! 잘 먹었어!' 라고 쪽지를 남겨놨다. 전기밥솥만 사용하는 나라에서 압력밥솥으로 잘 지어진 쌀밥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맛이었겠지. 쿠쿠 만세.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갔을 때 보고서는 웃겨서 한참을 웃었었다. 친구의 감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날 손수 구운 쿠키까지 이어졌다. 보통 그래도 얼굴을 아는 사이에서는 이 정도가 예의이지 않던가.



여하튼 우리 집 새앙쥐는 잠시 잠잠해졌다. 다들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도 그만 하기로 했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 난무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사서 먹어!"라고 커다랗게 부엌에 써 놓았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다 자란 성인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새앙쥐를 만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내 것은 내것이며 네 것은 네것이다. 훔쳐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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