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의 온도
자전거는 저절로 잘 타게 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아침마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잘리지 않은 바케트 빵과 신선한 과일을 담고서는 지나가는 행인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고. 그리고는 계란 하나를 톡 하고 프라이팬 위에 올려서 지글지글 구우며 시작되는 상쾌한 아침! 이것이 내가 꿈꾸던 독일 생활이었다.
음, 그랬다. 며칠 전 자전거를 타다가 도보 턱을 넘지 못해 그대로 날아가기 전까지는. 아니 사실, 자전거를 타면서 단단하게 헬멧도 쓰고 손목 보호대를 하면서 꿈꾸던 로망은 거의 산산조각이 나긴 했다. (그리고 그 헬멧이 나를 살렸다). 어쩌면 두 발 자전거를 갓 태어난 새끼 조랑말처럼 탈 때부터 로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썰리지 않은 바케트 빵은. 집에서 그거를 하나하나 썰고 있으면 손목이 그렇게 저려 올 수가 없다. 마트 안에 쓱-싹 쓰읏싹 하면서 썰어주는 기계가 떡하니 있다. 넣어서 1초 후면 균일한 크기로 잘려 있는 빵을 만날 수 있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가볍게 건네는 이웃과의 인사! 특히나 마트에서 물건 파는 상인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정답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로망은 독일에 도착 한 날 끝이 났다. 여기도 바쁜 동네다. 특히 대도시는. 내가 눈 뜨기 전에 마트는 이미 장사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단골손님이 되기에 나는 너무 작은 손이다. 아마 하루에 50유로 이상 쓰는 손님은 단골로 기억을 하겠지만.
카페에 가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 하며 책을 읽는 시간에 대한 로망은 또 어떠한가.
한국에서도 부족하던 하루의 시간이 여기라고 48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리고 유학생은 한 푼, 한 푼이 소중하다. 집 안에 큰 맘먹고 장만한 커피 머신이 생긴 이후로 카페에는 발길을 딱 끊었다.
모든 로망이 와르르 무너지자 나는 이미 여기에서 삶의 3분의 1 정도를 살아낸 사람이 되었다. 이젠 한국에서도 이방인이고 독일에서도 이방인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어디에서나 발만 담근 이방인이 되는 놀라운 기적이란.
그런 삶에 종종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홀로 떠 있는 외딴섬인 줄 알았는데 삐꺽 거리는 작은 돛단배가 종종 놀러 오는 것이다. 어떤 날은 사람을 태우고, 또 어떤 날은 맛있는 음식을 싵고. 나는 그 순간을 낭만이라고 부르는데, 그 짧은 시간이 매일 팍팍하게 쌓여가는 삶의 밑거름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안에 가만히 씨앗으로 잠들어 있던 시간의 이야기. 미루고 또 미루다 이제는 잃어버릴 것 같은 작은 일상의 감정과 이야기를 풀어내 보려고 한다.
낮과 밤이 뒤바뀐 시차와 파란눈의 외국인 사이에서 외딴섬처럼 오롯이 살아내는 나날들.
나와 시선을 공유했던 많은 것들의 순간을 길게 남기고싶어졌다.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