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피로

쌉-T

by seoul

가족 안에서 다른 언어를 겪는 불편함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그리고 성인이라 불리기까지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처음엔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말을 어렵게 하는 건 아닐까, 나만 다른 세계에 있는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코드가 달랐던 것이다.
대화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언어유희를 좋아했다.
말장난, 중의적 표현, 함축된 의미 —
그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노는 게 즐거웠다.
한 문장에 여러 겹의 의미를 숨기며,
그 안에서 사람의 생각을 읽는 일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런 나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해석해야 하는 문장’이 되었고,
그 친구는 항상 여러가지 뜻을 내포한 의미심장한 이야기들로 꾸며내느라

번역의 피로를 느낀모양이다. 짜증이 났을 거라 생각이 든다.

그땐 그냥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후로, 대화에는 분명한 간극이 생겼다.
우린 생각의 회로가 달랐다.
나를 T로 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사실 F였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정확히 말하자면 오해받지 않기 위해,
나는 현대식으로 “쌉-T”가 되어버렸다.

정재형의 유튜브에서 고현정 배우가 말한 그 ‘쌉-T’.
그 단어 하나를 세련된 태도로 남겨버린 그녀의 힘이 놀라웠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너도나도 ‘쌉-T’를 외쳤다.
F에서 갈고 닦이고, 밀려나 T가 되어버린 나는,
이제 언어의 충돌 속에서 서성인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의지했던 언니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족 안에서 아웃사이더였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그렇게 되었다.
언니들 사이에는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었고,
그 안에 나는 없었다.

카카오톡이 남긴 나쁜 문화다.
편리함을 팔며 ‘배제의 일상화’를 만든 도구.
이제 대화창은 말이 아니라,
관계의 위계를 시각화하는 창이 되어버렸다.
누가 빠졌고, 누가 초대되었는지로
서열이 정해지는 시대의 언어.
나는 그 언어를 읽는 데 너무 피로해졌다.

그래서 그 관계와 배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쿨한 사람으로,
멋지게 ‘쌉-T’로 살아간다.
하지만 가슴 한켠은 여전히 시리다.
소외되던 어린 시절의 감정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리곤 알게 됐다.
즐거운 일, 좋은 일, 하고 싶은 일은
가족과 함께하지 않아도, 친구와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진짜 편안한 관계는 번역이 필요 없는 관계라는 걸.

아이와 나, 둘뿐이어도 충분하다.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의 언어가 되고,
우리가 쌓는 시간이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그만큼 무해한 것도 없다.

번역의 오류를 야기시키는 피로를
굳이 흡수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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