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으로 이어지는 관계
나의 한숨을 읽는 아이,
엄마의 한숨이 궁금한 아이.
눈을 뜨고 학교에 가는 시간부터
밥을 먹고 게임하고 잠들기까지,
학교활동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나와 보내는 아이는
나의 숨소리 하나에도 변화를 알아챈다.
반대로 나는 엄마의 한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랐다.
어릴 적, 엄마가 왜 나를 보지 않을까.
왜 말하지 않을까.
왜 그렇게 자주 한숨을 쉴까.
나는 그저 엄마 옆에만 있어도 좋았던 아이였는데,
그때의 나는 엄마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나의 아이는 나를 본다.
눈빛 하나, 웃음소리, 한숨 한 줄로
그는 내 마음의 결을 읽는다.
“엄마는 웃음이 두 가지가 있어. 흐흐흐흐랑, 악하하하하.”
“엄마가 진짜로 웃을 때가 좋아.”
기가 막힌다.
내가 숨기지 않아도, 아이는 다 알아챈다.
그의 말 한마디가 내 하루를 해독한다.
나는 엄마를 통해 나를 보고,
아이를 통해 다시 엄마를 본다.
그 순환의 감정 속에서
한숨이 웃음으로 바뀐다.
엄마는 아이 넷을 키우며
“제정신으로 살 수 없던 날이 많았다”고 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으면
어린 내가 엄마 얼굴을 때리며 말했다고 했다.
“엄마, 나 좀 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유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그제야 나는 엄마의 고단함을 이해했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
그 나이에 네 아이를 돌보며
정신이 멀어지는 순간이 많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엄마의 습관을 조금 닮았다.
그건 혼잣말이다.
어릴 때도, 지금도 나는 자주 중얼거린다.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던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혼잣말을 했다.
“엄마 누구랑 얘기해?”
아이의 물음에 뜨끔했다.
“엄마? 마음속 친구한테 얘기했어. 너무 속상해서.”
“그 친구 이름은 뭐야?”
그때 얼떨결에 이름을 만들어 말했다.
“미미야. 엄마 친구 미미.”
“엄마가 미미한테 너 얘기도 했어.
가끔 엄마는 친구한테 안부를 물어.”
그렇게 시작된 ‘마음속 친구’ 이야기는
아이에게도 전염됐다.
서로의 마음속 친구에게 한 말을
다시 서로에게 들려주며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자꾸 마음속 친구한테만 말하니까 질투나.”
그 말에 혼잣말이 줄어들었다.
대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엄마가 이런 일이 있었어.
이런 생각을 했어.”
그러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아이의 반응은 따뜻했고,
그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줬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나를 알아채는 아이가 있어 감사하다.
엄마를 헤아리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안타깝지만,
이제야 조금은 이해한다.
그 시절의 엄마를 위로하듯,
나는 아이에게 장난을 건다.
아이처럼, 나도 장난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건 말이 아니라 온도다.
서로의 숨으로 이어지는 대화.
이토록 단순하고,
이토록 깊은 이해는
언어가 아니라 존재로 전해진다.
“우리는 말보다 숨으로 통한다.
그게, 가장 오래가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