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순서

선물은 아무한테나 주지말자

by seoul


《립스틱의 각도 15화 – 선물의 순서》


5월, 선물의 계절

5월은 유난히 선물의 계절이다.
누군가는 카네이션을, 누군가는 초콜릿을,
나는 립스틱을 선물했다.


처음엔 단순한 제스처였다.
감사의 말보다 립스틱 하나가 더 쉽게 미소를 만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제랄린이었다.


“이건, 샤넬이에요. 이미지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그녀는 미묘한 미소로 받았다.
“그래, 역시 감각이 있네. 이런 건 타이밍이 중요하거든.”
그 말에 묘한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그다음은 파툴린이었다.
“입생로랑, 신제품이에요.”
“어머, 나 이 색 너무 좋아해요.
근데 너무 과분한거 아니에요?”
거짓말이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에게 하지 않은 선물

책상 위에 남은 디올 립스틱 하나.
그건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포장을 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한참 동안.


제랄린의 샤넬은 사무실 한복판에서 당당히 빛났고,
파툴린의 입생로랑은 욕망의 냄새를 풍기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내 디올은 여전히 서랍 속에 있었다.
내가 나에게 주지 않은 선물.


‘누군가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
왜 이렇게 나를 피곤하게 만들까.’
나는 거울을 보았다.
입술은 말라 있었고, 색을 잃은 얼굴은
그동안 바르지 못한 립스틱처럼 바래 있었다.


선물의 순서가 잘못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다.

선물에는 순서가 있다는 걸.


첫 번째는 나에게,
두 번째는 나를 지탱하는 사람에게,
세 번째는 그 외의 세상에게.


나는 그 순서를 완전히 거꾸로 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정과 호의를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순서를 잃은 채.


제랄린에게 준 샤넬은 권력에 대한 경의였고,
파툴린에게 준 입생로랑은 불안에 대한 위장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 건네야 했던 디올은
그 모든 눈치를 버린 ‘자존의 상징’이었다.


디올의 리추얼-

5월 마지막 날, 퇴근 후 조용히 사무실 불을 끄고
서랍 속 디올을 꺼냈다.
은은한 금빛 케이스가 손끝을 감쌌다.
누군가에게 주려던 것이 아니라,
오래 미뤄둔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거울을 보며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이건 나에게 주는 리추얼이야.”
립스틱을 입술에 스쳤다.
선명한 색이 번져 나갔다.
처음으로, 미소가 진짜로 내 얼굴에 머물렀다.


그제야 알았다.
선물의 순서란 결국 ‘나를 잃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다음날, 폴라가 나를 불렀다.
“소산나 씨, 그 립스틱… 색 예쁘네요.”
“디올이에요.”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대신, 순서는 꼭 지켜요.”


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순서요?”
나는 미소 지었다.


“가장 먼저 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니까요.”


“나는 이제, 나에게 선물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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