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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미워하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지우지 않고 두는 선택

by seoul

오랫동안
나는 기억을 미워했다.

특히
쪽팔린 기억들.

왜 하필 그 장면들만
이렇게 선명한지,
왜 잊히지 않는지,
왜 지금까지 따라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더 미웠다.

그래서
없애려고 했다.

생각을 끊고,
다른 걸로 덮고,
억지로라도 지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 또렷해졌다.

지우려 할수록
더 깊게 남았다.

그때 알았다.

이건
지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는 걸.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남는 방식만 바뀐다.

억지로 덮으면
다른 장면 위에 올라타고,
밀어내면
다른 시간에 튀어나온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없애는 게 아니라
그만 미워하기로 했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
이제는 묻지 않는다.

“왜 아직도 이래.”
“왜 이걸 못 잊어.”

대신
그대로 둔다.

불편한 채로,
어색한 채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처음에는 이상했다.

미워하지 않으면
더 커질 것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다.

미워하지 않으니까
붙잡지 않게 됐다.

붙잡지 않으니까
머무는 시간이 짧아졌다.

그 장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불쑥 튀어나온다.

다만
예전처럼 오래 머물지 않는다.

기억은 그대로인데
내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그 장면과 싸우지 않는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계속 이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수치는
없어지지 않는다.

기억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우는 대신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생각보다
나를 덜 소모시킨다.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을 가지고 산다.

다만
이제는
그 기억을 미워하지 않는다.


#기억대로두기 #놓아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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