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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Dec 10. 2023

퇴근길, 서울로



매서운 추위가 성질을 부려대더니 하루 아침에 날이 따스해졌다. 나는 얼굴이 따가울 정도의 추위속에서도 찬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다. 낡아빠진 신조어 ‘얼죽아’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는 사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겨울의 초입 같은 날씨가 찾아오면 따뜻한 차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초겨울과 늦겨울엔 늘 달착한 차 향기가 내 몸 구석구석에 뭉근하게 배어있다.


퇴근길 카페에 들러 주문을 마친 나는 배정 받은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며 구석 자리의 남녀에게 시선을 넘긴다.


과잠바를 입은 스무살 남짓의 젊은 남녀가 공부를 하러 온 듯 책과 노트북으로 테이블 위를 어지럽히고 있다. 둘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시시덕 시시덕. 그러다 들고 있던 펜으로 상대의 팔을 괜시리 쿡 찌르기도 한다.


저 어지러운 무모함이, 새싹같은 파릇함이 꼭 언젠가 내가 갖고 있던 그것과 같아 눈을 뗄 수 없다.


ㅡA-34번 손님, 카모마일 티 나왔습니다


나의 퇴근길은 늘 서울로를 거친다. 서울로는 과거의 고가차도를 개보수하여 만든 거대한 육교이자 공원이다. 곳곳에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있고 꽤나 높아 서울역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서울로를 걸으면, ‘앞으로 걸어간다’라는 수동적 행동만으로 채워진 흑백의 퇴근길에 ‘볼거리’와 ‘생각’이라는 색깔들을 첨가 할수 있어 좋다. 다른길로 가는 것이 더 빠름에도 불구하고 꼭 서울로를 거쳐 퇴근을 하는 이유다.


콘크리트 바닥을 디뎌가며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왼편에 흰색 메트로빌딩이 나타난다. 그 메트로빌딩을 가만 두고 앞으로 앞으로 왼발 오른발을 옮겨놓다보면 흰색 건물 뒷편으로 갈색의 대우재단빌딩이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둘의 크기와 각도가 어찌나 절묘한지 해가 기울면서 사물에 그림자를 내듯 흰 건물 뒷편으로 갈색의 건물이 늘어져나오는 구도가 아주 재미있다. 건물의 나열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 현상만으로도 예술성에 대한 호들갑을 떨어대며 주변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던때가 있었다.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 현실의 혹독함이라는 웃풍이 지칠줄모르고 불어닥치면 마음속 방 한켠엔 곰팡이가 덕지덕지 피어오른다. 내 나이든 매일은 콘크리트 바닥을 맨발로 걷는 것과 같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리고 거친 바닥에 발바닥이 긁혀 상처를 입는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 따위 없이 가여운 발과 메마른 바닥만 쳐다보느라 안절부절, 연신 고개를 쳐박는다.


대우재단빌딩마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면 그 뒤로 기차역이 나타난다. 기차역은 젊은 누군가의 설레임이고 늙은 누군가의 그리움이다. 기차역 위에 아슬아슬 걸려있는 해는 누렇게 타오르는 시간을 뿜어낸다. 도처에 흩뿌려진 시간은 하늘을 붉게 익히고, 무르녹은 하늘은 싱그럽던 오후를 잔뜩 깔아뭉개 짓무르게 만든다. 그 혹독한 시간이 땅에도 가라앉으면 서울로를 걷던 이들에게도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날이 풀린 탓인지 서울로를 걷는 이들이 많다. 어떤이는 찾아온 온기가 반가운데 어떤이는 찾아올 추위가 두렵기만 하다.


번듯한 정장을 입고 듣기좋은 구두의 또각 소리를 퍼트리는 이들 사이로 빛 바랜 노숙인이 바시락거린다. 그는 남들이 버린 거적대기를 몇겹이고 껴입어 누더기가 되어있다. 있는 힘껏 끌어안은 짐꾸러미엔 무의미한 잡동사니만이 가득하다.


서울로의 오르막이 평지로 변하면 곳곳에 심어진 참억새를 볼수있다. 참억새는 끝부분이 데글데글 말린, 복실한 꼬리를 가졌다. 데글거리는 꼬리들은 하나의 줄기에 모여 다발을 이룬다. 그 다발들이 또 한데 모여 파도를 만든다. 모래색 파도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주황빛 포말을 일으킨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이제 서울로는 기차역 위를 지난다. 황혼이 내려앉은 기차역의 풍경을 담기 위해 젊은이가 카메라를 세운다. 젊은이는 시간이 허락한, 하루중 가장 아름다운 찰나를 카메라에 담기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그 옆, 홀로 앉아 있는 보랏빛 패딩의 노인은 세월을 감아 두르고 출사 나온 젊은이를 눈에 담아 기억을 더듬는다.


카페 안 연인이 이 장면을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기차역 이쁘다. 노을 이쁘다. 갈대 이쁘다. 갈대가 아니고 억새야 바보야. 시시덕 시시덕.


나는 가라앉은 내 젊음을 사랑으로 떠올린다. 내 스물의 사랑은 가난했고 파릇했으며 단단했다.


고급 호텔에 가진 못했으나 그녀가 살던 빌라 옥상에서 먼지를 깔고 앉아 달빛의 허여멀건함 같은 것들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밤을 새곤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쾌적한 드라이브를 하진 못했으나 각자의 손에 맥주 한캔씩을 쥔채 도로변 언덕길을 걸었고 서로를 보고는 마냥 좋다며 한참을 웃어대기도했다. 시시덕 시시덕.


나는 너를 나의 젊음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나는 먼 훗날 떠올릴 '그때의 젊음'이 될 수 있을까.


보랏빛 패딩을 입은 노인이 무릎을 짚고 비끄덕 일어난다.


ㅡ거 가만 있어 또 자빠질라고


청록빛 바람막이를 입은 노인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보라빛 패딩을 입은 노인의 팔짱을 낀다. 둘은 어그적 어그적 서울로를 걸어간다. 그들이 가는 길 끝에 여전히 노랗게 빛나는 태양이 걸려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뒤에 달라붙어 발걸음을 붙잡는 너의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지. 시간은 빠르게 달려 행로의 중턱을 넘어서는데 마음은 스물의 너에게 붙잡혀 어그적 어그적. 시간의 뒷통수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심할정도로 느리기만하다.


내가 네 품에 떠넘긴 사랑이 너무나 깊고 무거워 너는 뉘엿뉘엿 지고 말았다. 품에 안은 사랑이 무의미한 잡동사니처럼 되었을 무렵 너는 또각또각 내 곁을 사라졌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빙빙 돌며 바시락대고 있다. 네가 저물은 자리엔 길고 무거운 그림자만 끈적하게 늘어져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서울로의 갈림길에 닿았다. 여기서 내려가야해. 퇴근을 해야지. 일이 끝났으면 집을 가야지.


나도 노부부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걸어간 그 길을 따라간다. 맞잡을게 없어 추위만 만지작 거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발뒷꿈치에 그림자만 메단채. 서울로를 지나 기차역 위로. 도로변 언덕길을 넘고 달빛이 먼지위에 가라앉은 빌라 옥상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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