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야. 왜 토끼가 됐니.
그녀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책을 사근히 쓰다듬는다.
공주가 태어날 때 온 왕국이 기뻐했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주가 탄생했다고 말이야. 하지만 깊은 산속 마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아름다운 마녀가 제일의 아름다움을 빼앗기는 게 질투 나서였을까? 아니지 그럴 리가. 마녀는 추악하고 또 추악했어. 그랬으니 아름다움이 미울 수밖에. 마녀는 공주가 20살이 되던 해 저주를 걸었어. 공주는 시시때때로 털이 북숭해져 뚱뚱해 보일 것이고 눈은 새빨갛게 변해 그 누구도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싶지 않아 할 것이며 귀는 흉측할 정도로 길어져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축 늘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토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여전히 그 동화 타령이야?
동화책이 덮이면 그 속의 인물들은 어디로 갈까. 아무 곳도. 덮이는 것은 덮이는 것일 뿐, 다시 누군가 책을 펼쳐줄 때까지 검은 종이 사이에 갇혀있는 거지.
사는 게 힘들다며 두 눈을 축축하게 적신 채 집에 들어온 너는 기계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씻고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남은 일거리를 책상에 펼쳐놓곤 한참을 바라보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눕는다. 그토록 싫어하는 회사를 집까지 묻혀온 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어 말을 아낀다.
나는 너에게 우리가 초능력 토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게 뭔데?
너희 회사는 알고 보니 어둠의 조직이었던 거야. 회사는 너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그 결과로 넌 강력한 초능력을 얻었지만 때때로 토끼로 변해버려.
저주받은 공주 아니었어?
기억 못 하는척하더니 사실은 재밌었구나?
참나...
그런데 내가 실험까지 당해야 돼?
일단 들어봐. 조직은 너한테 충성을 요구해. 하지만 너는 듣지 않고 박수를 세게 쳐.
박수를?
네가 박수를 치면 눈앞에 있던 모든 것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거든. 당근, 고양이, 설탕, 바람, 모래, 나뭇잎.
그리고 나도 토끼로 변해.
너도 실험을 당해?
아니? 나는 아니지. 나는 백수니까. 백수 같은 내 모습이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해서 무척 깊은 한숨을 쉬는 거야. 그때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살고 있던 한숨의 신이 '이렇게 갸륵한 한숨은 처음 본다'며 감명해서 나를 토끼로 바꿔줘.
지만 좋은 거 하네.
초능력 토끼가 된다. 우리는 하늘을 날고 구름을 가른다.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당근으로 만들어버리자. 은행도 없애버리자 대출금 안 갚아도 되게. 아예 날아서 섬으로 갈까. 그곳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게. 그 누구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게. 우리만의 왕국을 꾸미며.
웃겨. 초딩도 아니고.
너는 허튼소리 그만하고 자자 하며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낡은 침대의 스프링 소리가 징겅징겅. 나는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몸을 살짝 들어 올려 너의 얼굴을 살핀다. 입술이 샐쭉 광대를 찌르고 있다.
어찌나 낡아빠졌는지 푹신함은커녕 스프링의 딱딱함에 몸이 배기는 침대. 안식을 위해 고요함을 즐기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층간 소음. 아무리 락스로 닦아내도 때가 되면 방안 구석에서 조용히 몸집을 불려대는 곰팡이. 우리의 더럽고 시끄럽고 불편한 왕국.
집 밖의 우리는 인간이었다. 인간이기에 면과 폴리에스터로 된 싸구려 옷을 입고 추위를 견뎌야 했다. 인간이기에 먹고살기 위한 일을 해야 했다. 인간이기에 직장 상사의 푸닥거리를 견뎌야 했다. 인간이기에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 자신을 매일같이 탓해야 했다. 인간이기에 인간이기에 인간이기에 인간이기에 지겹게 인간이기에.
집에 들어와 서로를 마주한 우리는 초능력을 가진 토끼가 된다. 온몸에 나 있는 복실복실한 털은 어찌나 풍성하고 보드라운지 가시덤불 위에서 잠을 자도 불편함을 느낄 수 없다. 쫑긋 세워져있는 귀를 돌돌 말아 귓구멍에 끼워 넣으면 그 어떤 듣기 싫은 소리도 막아 낼 수 있다. 왕국 구석구석 검은 악당들이 침범해오면 너와 나는 날을 잡고 출동해 그들을 무찔렀다. 마미손의 축복이 담긴 장갑과 오공의 세례를 받은 마스크를 끼고 모든 악을 유한하게 만들어버리는 락스를 스프레이로 뿌려대며. 한 명은 으웩. 다른 한 명은 거기 흐르잖아 좀 잘 닦아봐. 티격태격 대며.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동화책을 펼쳐 읽었다. 곰팡이를 지운 자리에 허무맹랑한 꿈들을 심어나갔다.
우리는 때로 호랑이가 되었고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가 되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찾아가 겁주고 혼내고 물리쳐주는 호랑이. 사람들이 질펑질펑 밟고 지날 때마다 작은 범람을 일으키고 마음에 파동이 번져나간다 해도 금세 햇빛에 몸을 말려 하늘로 올라가 희고 퐁실한 구름이 되는 물웅덩이.
우리는 서로가 뱉어대는 유치한 꿈을 먹고 자랐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너의 입에서 나온 꿈들 덕분이었다. 넌 내 글이 좋다 말했고 작가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라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또 믿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작가는 무슨 저자 정도지. 해놓고서 네가 보지 않는 곳에 숨어 두 손을 꼭 맞잡고 염원이 담긴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우리의 모습은 그 웅덩이를 지나 구름이 되었고, 호랑이로, 다시 토끼가 되었다가, 들판 위의 바람으로, 땅굴 속 낮잠을 자는 들쥐로, 또 한갓진 고양이의 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햇살로.
그러다 우리는 진창이 되었다. 어찌나 많은 시련들이 물웅덩이에 신발 밑창을 씻어댔는지 맑던 물은 오물이 되었고 묽던 물은 가득한 앙금에 먹혀 진흙이 되었다. 묻어 들어온 흙과 먼지와 이물질들의 공세를 결국 이겨내지 못해 가라앉고 말았다.
무너짐은 여행지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드러났다.
"이젠 너도 그쯤하고... 기술을 배워보는 건 어때? 전기라던가 용접이라던가"
결국은 돈이지 뭘. 현실은 고약하고 밉상스러운 심술쟁이. 행복한 얼굴로 하늘을 떠다니던 꿈에 밧줄을 걸어 기어코 끌어내려야 속이 시원하지. 어찌나 안간힘을 써대는지 잔뜩 붉어지고 못생겨진 얼굴로 끙끙.
그 어떤 아름다운 동화도 마지막 장이 존재한다. 그들의 모험은 계속됩니다. 그런 서운한 말과 함께. 미안. 근데 이걸 어쩌나? 여기서부터 너는 따라올 수 없어.
우리의 모험도 끝 장을 맞이했다.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우리. 책을 덮은 것은 숲속의 괴물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악당도, 초능력 토끼를 시기한 초능력 여우도 아니라.
네가 사라진 왕국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모험가들의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던 가시덤불은 중고 시장에 떨이로 내놔도 선택받지 못할 낡아빠진 침대가 되었다. 위층에 사는 사람은 바닥과 원수라도 진 양 뒤꿈치에 온 힘을 실어 내 머리를 찧어댄다. 이 방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은 검고 더러운 곰팡이뿐이다.
동화의 마지막 장이 덮인다. 아름다운 공주와 용사, 마왕과 토끼의 모험은 머리카락 하나 못 들어갈 좁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책의 끝 장, 세금 징수원 같은 폰트의 글자가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임을 알린다.
초능력 토끼
값 1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