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1화
20살 때 교회를 옮기고 나서 그때 처음, 내 인생에 있어서 방황의 바람이 아주 씨게 불어와 2년 동안 망나니처럼 살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돌아온 이 교회는 여전히 낯설고 서먹했다.
교회를 영영 떠날게 아니라면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열심히 다녀보기로 결심한 이 교회에 정을 좀 붙여보고자 친구랑 같이 팀활동을 하기로 했다. 쉽게 말하면 대학 동아리 같은 느낌이었는데 극극내향인이었던 친구와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며 또 적당히 많은 사람들이랑 친해질 수 있는 팀으로.
해서 들어간 팀은 영상을 직접 찍고 만들고 제작하는 팀이었는데 교회 내에 이벤트나 여러 소식들을 만들어 광고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그때 난 그 팀원 중 어떤 오빠를 좋아하게 됐고 지금의 남편도 거기서 만났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가 좋아했던 오빠는 지금 옆에 있는 이 오빠가 아니었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에게 전혀. 아주 아주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아니, 관심 이전에 각자 첫인상부터가 완전 최악이었다. 나는 남편을 보자마자 '와 진짜 싸가지없게 생겼다' 했고 남편은 나를 보고 '와 진짜 놀기 좋아하게 생겼다' 했다고.
근데 둘 다 느꼈던 첫인상이 딱 들어맞았다. 그때 나는 놀기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남자친구는 정말 말하는 게 싸가지가 바가지였다. 그렇게 우린 말도 제대로 섞어보기도 전에 서로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때 내 이상형은 확고했다. 내 친구들과 우리 막내이모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한결같았는데 연예인으로 치면 SG워너비의 이석훈 같은 스타일이었다. 아니 그냥 이석훈을 엄청 좋아했다. 나는 검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에게 눈길이 가는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지나가다 그놈의 검은 뿔테안경을 쓴 남자만 보면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다.
팀에 그 오빠가 딱 그랬다. 스타일도 좋은 데다가 훈훈한 외모에 뿔테안경까지 쓴 99% 내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지금의 남편은 전혀 내 이상형에 눈곱만큼도 근접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아예 정 반대 스타일이었다. 해병대를 갓 제대했어서 그런지 거의 빡빡이인 머리 때문에 인상까지 더 사나워 보였고 그 인상 그대로 툭툭 내뱉는 말도 냉랭한 싸가지바가지 그 자체였다.
그러니 애초에 서로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그 오빠만 보였고 극극 내향인답지 않게 불도저를 탄 소녀가 되어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다. 카톡에 그 오빠 프로필을 켜놓고 연락해 볼까 말까 고민하다 실수한 척 보이스톡을 누르고 (그땐 실제로 실수로 눌러지는 경우가 많았음) 영화 보러 가자 그러고. 툭하면 뭐 하냐고,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고 질척거렸다.
저 패기는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지금은 하래도 못 할 것 같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심지어 팀 모임이 있는 날 그 오빠가 못 나오면 나도 따라서 안 나간 적도 있다. 재미없을 것 같아서. 교회에 정을 붙이기는커녕 팀을 내 사리사욕 채우는 목적으로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으이구 참 못났다.
그렇다고 팀 모임을 아예 안 나갔던 건 아니다. 나름 열심히 했다. 영상 편집 프로그램은 아직까지도 못 다루지만(?) 회의 때 아이디어도 몇 개 얹고 그랬다. 진짜 못났다.
그렇게라도 몇 번 모임에 참석했더니 첫인상 최악이었던 지금의 남편과도 자연스레 말도 트고 조금씩 친해지게 됐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말장난도 잘 치고 의외로 유쾌한 모습이 있었다. 말투가 아주 살짝 거칠긴 했지만 (역시나 싸가지는 좀 없었음) 밝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내가 일하는 빵집에도 종종 놀러 왔었다. 처음엔 교회사람들이랑 오다가 점점 혼자서도 몇 번 오더니 자리에서 공부하다 가거나 내가 좋아하는 녹차라떼도 슬쩍 사다 주고 갔다. 같은 팀원 중에 그 오빠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잘 되게 도와준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래놓고는 처음과 다르게 나한테 하는 행동이 어느 순간 달라졌었다.
퇴근할 때쯤 와서 같이 저녁 먹자, 같이 예배드리자,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야식으로 치킨 먹자 어우 처음엔 부담스러워서 몇 번 거절했지만 해병대 정신에 온몸을 지배당했는지 아주 고집스러우리만큼 꿋꿋했다. 그 오빠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역시 사람은 역으로 똑같이 당해봐야 아는가 보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뻔히 알고도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하고 싶은 거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마침 교회 같이 다니던 친구가 몇 달 해외에 나가게 됐었는데 그때 그 자리를 대신해 줬고 덕분에 나는 혼자 있지 않아도 돼서 고마웠다.
그러다 나도 고마운 마음 이상으로 점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항상 같이 저녁을 먹고 같이 걷고 꾸준히 데려다주다가 우리 엄마까지 마주치고 계속 연락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렇게 헌신적인데 안 변할 수가 있을까. 이젠 이석훈 같은 그 오빠가 안중에도 없었다. 해병대가 이석훈을 이겼다. 사실 그렇게 티를 내고 연락을 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던 것도 있다. 어린 여자애가 오늘만 사는 것처럼 날 좀 봐달라 대놓고 발악을 해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리고 외모는 99% 내 이상형에 가까웠지만 결정적 1%로 마음이 확 기울게 만들었던 것은, 재밌지가 않았다. 음. 그래 맞다.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