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남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2화

by 이봄


내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던 내 남자친구는 집착이 좀 심했다. 겉으로 표현해 주는 거, 이성을 대할 때, 그리고 내 옷차림에 대해서도 심하게 간섭하는 편이었다. 먼저 해명 아닌 해명을 하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주변 친구들이 다 알정도였다. 조금이라도 파인 옷은 불편해서 못 입었고 목까지 바짝 올라오는 티셔츠나 카라티 위주로만 입는 유교걸 중에 유교걸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절대로 맨살이 드러나는 노출이 심한 옷을 즐겨 입는다거나 딱 붙는 옷, 파인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에 옷을 좋아했고 유행에 민감했으니 그때그때 스타일에 따라 좀 맞춰는 입는 정도였다.




남자친구는 나를 만나면 항상 내 옷을 스캔했다. 나랑 데이트하는 건 좋아서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늘 이리저리 굴려 내 옷을 먼저 살펴보고 있었다. 하루는 속에 나시를 받쳐 입고 시스루 스타일로 펀칭 디테일이 들어간 가디건을 걸치고 나갔다가 된통 지적당해 다시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온 적도 있다. 숭숭 뚫린 구멍으로 내 살이 다 비쳐 보인다며 맘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게 남자친구한테는 엄청난 노출이었고 그렇게 내 옷차림으로 자주 실랑이를 벌였다. 만날 때마다 서로 스트레스였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운 적도 있다. 예배 다 끝나고 옆자리에 있던 친구가 혼자 머리 처박고 울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 왜 그러냐 물었다. 나중에 친구가 말하길 ‘아 얘가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나 보구나!’ 했다며, 은혜는 개뿔 역시나 내 옷차림 때문에 또 다퉜었고 그날 예배드리는 내내 속상해서 확 울어버렸다.





옷차림뿐만이 아니었다. 교회 형제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웃어주는 것, 오빠라고 부르는 것 등 질투심에 다혈질까지 어마어마한 남자친구였다. 근데 그만큼 남자친구도 스스로 처신을 잘했다. 알아서 잘 해주면 물론 좋지만 이렇게까지 열심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 이만큼 하고 있으니 너도 잘 지켜달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그래도 심했던 건 맞다.


나는 정말 주변 친구들이 다 알 정도로 옷차림에 있어서 노출이란 없는 사람이었고 (억울) 남자관계가 복잡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처음엔 남자친구의 그런 모습들이 나를 정말 많이 아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속이 좁아지고 유치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간섭이 내심 좋기도 했다. 근데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날 며칠 계속되니까 갈수록 너무 숨 막히고 힘든 건 사실이었다. 내 모습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남자친구의 그늘에 가려져서 사는 기분이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매번 싸우고 속상해서 우는 날이 잦아졌었다. 다행히 남자친구도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맘처럼 잘 안 된다며 내 앞에서 많이 울기도 하고 힘들어했었다. 남자친구는 지나친 소유욕과 불안감이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어떤 결핍이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문제로 자주 삐걱거려 한 번은 친구들한테 이런 부분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매일 붙어있어서 겉으론 너무 좋아 보이고 알콩달콩 잘만 만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심할 줄 몰랐다며 친구들은 당장 헤어지라고 했었다.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이기적이어도 되는 거냐며 나를 위해서 헤어지라고 위로해 줬었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헤어지기 싫었다. 고민한 적은 많았지만 절대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회할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늘 한결같이 표현해 주고 연락도 꼬박꼬박 잘하고 집까지 매일 데려다주고 일주일에 8번을 날 보러 왔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물론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해 주는 사람인 건 변함이 없었고 그건 오롯이 나만 알 수 있는 마음이었다.


정식으로 사귀기 전에 나는 ‘나한테 미친놈을 만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말 대단한 미친.. 남자친구였다. 주변 사람들이 질려할 정도로 정말 정말 나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나도 많이 변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고 스스로 결심하던 때에 그때 나에게 있어서 남자친구의 영향이 제일 컸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가끔은 네다섯 살은 더 많은 사람 같았다. 내 앞에서는 한없이 유치해지고 집착에 질투심에 다혈질 성격이긴 했지만(내 남친 좋은 사람이다..) 동시에 성숙한 모습도 있었다.


남자친구의 다른 면을 살짝 얘기해 보자면, 맡겨진 일은 책임감 있게 끝까지 성실히 해내는 사람이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말하지 않고 늘 차분하고 묵묵한 사람이다. 그리고 겉치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옷을 신경 써서 입는 그런 겉치레뿐만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내지 않는, 줏대 있고 어찌 보면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다.


늘 당당했고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나는 좋았다. 또 제일 중요한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음주가무, 유흥을 싫어하면 싫어했지 즐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뭐 하나를 하더라도 늘 나랑 같이 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허세가 없다. 모르는 게 있으면 아는 척 안 하고 바보같이 물어보는 모습이 좋았다. 약간 찌질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남자친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줏대를 나도 점점 닮아갔다. 나도 원체 고집이 좀 있는 성격이라 아마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던 걸 수도 있다. 그때 친구들한테서 변한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이전에 살았던 대로 살지 않으려 나 스스로 노력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보고 느끼고 하는 생각들이 바뀌고 가치관도 변하고 말도 행동도 달라졌다. 그랬던 시기에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부터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었다.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주말엔 같이 뭘 할지, 강아지는 키우는지, 어떤 가정의 모습을 원하는지. 서로 꿈꾸는 결혼생활의 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어린 나이었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고작 23살, 24살이었으니까.




‘집이 꼭 있어야 돼?’ 멍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전부터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좋은 집을 잘 마련해 놓는 것이 좋은 결혼의 주축이 되는 게 싫었다. 연애하면서 사소한 문제로 많이 삐걱거렸지만 같이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서서히 비슷해져 갔다.






연애할 때 남자친구는 학생이었고 나는 알바를 하고 있었어서 데이트 비용은 거의 내가 냈다. 밥버거를 주식으로 먹고 다닌 사람에게 데이트 비용까지 뜯고 싶진 않았다. 대학가 빵집 일을 그만두고 상록수역 배스킨라빈스에서 일했을 때, 남자친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을 내가 일하는 곳으로 귀가(?)했다. 점장님이 ‘어~ 00이 왔어?’ 할 정도로 꼬박꼬박 왔고 심지어는 크리스마스 때 하루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31일 써리원데이때는 하프갤런 두 통 사서 옆 공원에 주저앉아 남자친구랑 1인 1하프갤런을 우적우적 다 먹어치웠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웃긴 데이트였다.




내가 일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자리에서 공부를 하거나 하트 뿅뿅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저녁 6시에 퇴근하면 같이 한대앞 역까지 걸어갔다. 가성비 좋은 용우동에서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하나씩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우리의 데이트 루틴이었다. 그때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고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둘이 똑같이 입에 달고 살았다.




신기하긴 했다. 왜 그렇게 결혼을 빨리 하고 싶었는지. 왜 이 사람이었는지. 그때 주변 모두가 물어봤지만 그런 확신이 생긴 어떤 드라마틱한 순간은 없었다. 그냥 너무 자연스럽게 든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항상 알콩달콩하고 달달하기만 했느냐. 절대 아니다. 꾸준히 정말 질리도록 지겹게도 다퉜다. 이유는 말했듯이 남자친구의 질투와 옷차림에 대한 집착. 늘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연애하는 2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지지고 볶았다. 그런데도 좋았다. 인연은 따로 있다는 게 정말 맞는 것 같다.






keyword
이전 01화첫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