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질려버린 결혼 일기> 3화
남자친구는 대학교 4학년이 되고 취업학생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찍 취업을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결혼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신혼집 보증금, 신혼여행 등 빨리 결혼하려면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됐다. 아버지 사업장에서 생산직부터 해서 조금씩 배워나갔고 그렇게 조금씩 돈을 모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 하루종일 생산일을 하고 몸이 녹초가 돼도 변함없이 꼭 날 만나러 왔었고 항상 집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러고 남자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 나를 만나는 거에 있어서는 조금도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정말 한결은 사람이었다.
우리의 데이트는 주로 교회 아니면 교회 근처 동네 돌아다니는 거 그리고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는 게 전부였다. 안산 사람이라면 다 아는 20대 커플들의 데이트 성지인 중앙동은 거의 안 갔다. 사람도 많고 정신없는 곳은 남자친구가 더 싫어해서 그냥 둘이 조용히 손잡고 동네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제일 많이 했다. 어디 여행을 한번 가 본 적이 없으니 연애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추억은 없다. 지겹게 싸웠다는 기억 밖에…. (내 남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연애한 지 1년 반정도 됐을 무렵, 둘이서만 계속 결혼결혼 외친다고 뚝딱 되는 게 아닐 노릇. 진짜로 결혼이 하고 싶다면 준비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선 양쪽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우리 집 데려다주느라 오며 가며 우리 엄마는 자주 마주쳤어서 먼저 남자친구네 부모님을 뵙기로 했고 사동 댕이골에 있는 어느 한식당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냥 지나가다 마주쳐서 인사드리는 것도 아니고 멍석을 깔아놓으니 아주 저절로 몸이 쭈굴쭈굴해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 속에 어느덧 약속날이 되었고 댕이골 식당으로 갔다. 식당 입구 오른편으로 창가 쪽 맨 끝 에어컨 바로 앞 테이블에 두 분이 나란히 앉아계셨다. 나는 바로 고장 난 로봇이 되었다. 뚝딱뚝딱 인사를 드리고 앉아서 뚝딱뚝딱 밥을 먹었다. 뭘 먹었는지 메뉴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식당이니까 한식이겠지. 식사 도중 남자친구 친누나도 오셨다. 무려 가죽재킷을 입고. 나는 더 뚝딱삐그덕쿵쾅끼긱께겍 거리기 시작했다.
웃기라도 잘하자는 마음으로 두 분 하시는 말씀에 하하하 호호호 사람 좋은 웃음을 열심히 보였다. 남자친구 아버지께서 대학은 어디 다녔는지, 전공은 뭐였는지, 왜 자퇴했는지 물어보셨다. 앗차차. 나는 보잘것없는 대학에 그 대학마저 때려치우고 알바만 하면서 살았는데. 반대하시면 어쩌지? 우리 결혼 못하는 거 아니야? 응 아니었다. 딱히 할 대화가 없으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신 거였다.
식사가 다 끝났을 때쯤 남자친구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한 이 한마디가 기억이 난다. 남자친구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 없이 둘이 알아서 잘 준비하라셨고 서로 돕는 배필이 돼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전혀 생각지 못한 선물까지 준비해 주셨다. 다행히 이거 받고 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지라는 의미의 뇌물은 아니었다. 물론 뺨따귀도 안 맞았다. 드라마는 역시 다 과장된 거였구나. 휴우.
며칠 뒤 우리 엄마도 따로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정식으로 결혼 이야기를 했다. 엄마도 기분 좋게 허락해 주셨고 믿음만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미션을 모두 클리어했고 이제 상견례를 준비할 차례가 됐다.
2015년 8월 어느 날, 안산 고잔동 영의정에서 대망의 상견례를 했다. 양가 부모님과 함께하는 식사자리.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그런 날. 최대한 단정하게, 깔끔하게, 예쁘게 입고 열심히 조신한 척하느라 진땀을 뺀 날이다. 상견례 전에 우리 엄마도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나한테 물어보는데 낸들. 나도 상견례는 처음이라. 무튼 엄마도 나만큼 많이 긴장했던 날이다.
여기저기 검색도 해보고 추천받아서 간 곳인데 상견례 단골집이라는 명성답게 아주 차분하고 고급진 분위기였다. 그냥 밥 먹으러 왔다면 별 생각이 없었을 텐데 이날은 의미가 다르다 보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24살에 앳된 내가 상견례의 주인공으로 오기엔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가 어버버 있다 보면 나이스 타이밍에 어색한 정적을 깨고 정성스럽게 담긴 음식들이 코스로 줄줄이 들어온다. 넓은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놓아주시는데 그때는 괜히 다 같이 음식 칭찬을 해본다. 직원분도 이 분위기가 숨 막히시겠지? 빨리 놓고 나가고 싶으시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버텼다.
분위기고 맛이고 뭐고 이렇게까지 긴장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양가 부모님께 정식으로 우리의 결혼을 알렸고 모두 축복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셨다. 혹시나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어쩌지? 했던 걱정들이 말끔히 씻겨진 날이었다. 서투르고 부족한 점 투성이었지만 어찌어찌 아름답게 마무리된 우당탕탕 상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