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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바름 Jan 21. 2022

좀도둑

약간은 동화, 지금은 에세이

*대문사진 출처: PIxabay


좀도둑     


 언니들이 그랬다.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않으려면 선생님에게 빈혈이 있어서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면 된다고. 창백한 느낌의 빈혈이란 말을 언젠가는 써보리라 맘먹은 나는 거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낑낑대며 빈혈이란 말을 뱉었다. 평소 발표 한번 하지 않는 내가 어렵게 꺼낸 말을 담임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믿었다. 교실에 남아도 된다고 했다.     


 운동장에서 휘슬이 삑삑대고 구령을 붙이는 아이들 소리가 창문을 넘어왔다. 혼자 남은 교실 책상엔 아이들이 먹다 남긴 팩 우유와 의자에 걸쳐 놓은 점퍼, 색연필과 서랍을 삐져나온 교과서, 조각칼, 찰흙 덩이들이 부스스하게 부려져 있다. 건너 자리 경민이의 빨강색 책가방은 홀라당 열린 채 걸려있다. 들장미 소녀 캔디가 그려진 예쁜 가방이다. 참말 부러운 가방, 그때 열린 가방 안에서 뭔가가 반짝 한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가방에 넣는다. 동전이다. 곡식이 그려진 작고 하얀 동전, 손에 쥔 오십 원이 얼음을 쥔 듯 차다. 수업 종이 울리고 운동장에서 날랜 아이들이 먼저 교실로 쫓아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엎드린다. 어지럽다. 블랙홀이 교실 시멘트 바닥에 있나 보다. 다리가 무겁게 빨려 들어간다.     


 학교가 파하기까지 내내 경민이 눈을 피하다 옆 반 미야와 교문 앞에서 만나고서야 경민이와 어울려 집으로 향했다. 미야가 가느다란 두 팔로 나와 경민이 어깨를 감싸 안는다. 멀리서부터 내외하는 우리 둘을 본 모양이다.     


“둘이 또 싸웠니?”     


그제야 경민이 마른 숨을 훅 내 쉰다.     


“아유 답답해, 저 지지배가 아까부터 입에 지퍼 닫고 점잔빼잖아.”     


그런 줄 다 알았다는 듯 미야가 우리 둘을 이끌고 간다.     


“하얀집 가서 다 풀기다.”     


 분식점 ‘하얀집’에는 달콤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콘 과자를 기계에 가져다 대고 아저씨가 은색 밸브를 쭉 내리면, 하얗고 달콤한 것이 뱅뱅 달팽이 모양을 그렸다. 한 개에 오십 원하는 아이스크림 앞에서 경민이는 내내 책가방을 뒤지더니 그만 울상이 되었다.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나,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서 자기 한 입, 경민이 한 입 하고는 나에게 콘을 내미는 착한 미야, 됐다며 밀쳐내는 이상한 죄책감, 그날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청운 빌라까지 왔다.

    

  엄마의 외투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슬쩍하기 시작 한 것이 그때부터다. 손이 퉁퉁 붓는 것 같고 심장이 강낭콩만큼 졸았는데 훔친 돈으로 경민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문방구에서 깐돌이도 사 먹고, 족자도 하고 그랬다. 난 매일 잠들 때 기도를 했다. ‘이제 더 훔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하얀집 아이스크림 생각이 나고, 비밀수첩에 감춰둔 경민이랑 미야랑 같은 모양으로 골라서 산 판박이 스티커가 떠올랐다.     


 이웃돕기 성금을 거두는 날이었다. 엄마가 준 돈이 없어졌다며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책상에 있는 모든 책을 서랍에 넣게 하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돈을 훔친 사람은 지금이라도 조용히 손을 들면 용서해 준다고 했다. 어깨와 손이 떨렸다.     


‘난 아닌데, 정말 아닌데......’

     

혼잣말을 하는 사이 눈을 뜨라는 구원 같은 선생님 말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아무 말이 없었고, 깔깔대는 경민이와 미야는 도둑이 누군지 추리를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마냥 즐거웠다. 엄마는 더 이상 옷 주머니에 동전을 두지 않았고, 찬장에 모아둔 동전 그릇도 싹 비웠다. 그리고 나에게 학교 마치면 군것질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과묵한 아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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