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한 마음
“여기 봐봐 방금 뭐가 꿈틀했다.”
“어디 어디?”
놀란 우리는 땅을 파던 막대를 다 내려놓고 땅굴 속의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뺑 둘러섰다. 땅굴이라고 해봐야 큰 나무 한 아름이나 되려나……. 학교 파하자마자 청운빌라 뒷동산으로 달려온 나와 미야, 경민이와 강훈은 모종삽 한 개와 나무 막대로 틈틈이 땅을 팠다. 개미 빌라를 만들어 주자는 강훈이 말에 굴을 파고, 판판한 돌로 개미 식탁과 침대도 만들고, 깨진 장독 조각을 바닥에 들들 갈면 생기는 주황색 가루와 풀을 버무려 김치도 담고, 개망초를 꺾어 굴 안을 장식했다. 우리가 가고 나면 왕관을 쓴 여왕개미가 병사 개미들을 이끌고 굴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화려한 무도회를 펼칠 거라고 상상하며 개미 빌라를 꾸민지 일주일째다. 돌침대가 놓인 방 벽에서 진회색의 뭔가가 꿈틀했다. 나는 뭘 잘 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적댔다. 그새 사라졌기를 그런데 또다시 꿈틀한다.
“미야! 미야! 저것 봐라, 생쥐인가?”
굴을 살펴본 미야가 모종삽을 든 강훈을 앞장세운다. 마지못한 듯 강훈이 굴 쪽으로 다가간다. 강훈 주변으로 나와 미야, 경민은 어깨를 걸고 알 수 없는 회색 물체를 향해 눈길을 쏜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오줌이 마렵다. 강훈이 개미 돌침대 뒤쪽으로 삽을 살짝 내리친다. 그것은 사라졌다. 엄지손가락만 한 틈을 남기고 강훈이 내리친 삽에 놀라 눈이 녹듯 감쪽같이 없어졌다. 다시는 못 나오게 굴 벽을 꼭꼭 막아야 한다는 파와 뭔지도 모르는 데 유인해서 잡아보자는 파가 정확하게 두 명씩 나뉘어 그날 우리는 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무판자로 대강 개미 빌라를 덮어 둔 채 집으로 왔다. 밤새 여왕개미와 개미 부족이 회색 괴물에게 몽땅 잡아먹히는 꿈을 꿨다.
강훈은 그날 이후 주산 학원을 가야 해서, 경민은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서, 미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우물쭈물하다 냉큼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머릿속에 개미굴 생각만 가득했던 나는 할 수 없이 혼자 뒷동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널빤지는 우리가 덮어둔 대로였다. 신발로 맴맴 땅을 긁다가 돌멩이를 주워 탁! 하고 던졌다. 혹시 나와 있을지 모르는 회색 그놈을 향한 경고, 돌멩이를 또 하나 던졌다. 그냥 달아나 버리라는 부탁. 그때 미야가 막대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떨고만 있는 나를 보곤 쯧쯧 혀를 찼다. 판자부터 치우자고 했다. 넷이 들 때 보다 무겁지만 미야가 있으니까.
“우리 꽃이나 갈아주고 그냥 갈까?”
“내가 있잖아. 나만 믿어”
“강훈이 데려오자”
“순 겁쟁이 자식, 데려와서 뭐 하게”
판자를 치우자마자 우리는 그 틈새, 회색 물체가 꿈틀했던 거길 쏘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막대로 틈새를 판다. 미야가 먼저 파고, 이어서 내가 파고, 뒷동산으로 노을이 무리 지어 번진다. 막대 끝에 뭔가가 걸린다. 낚시하듯 슬쩍 채어 당긴다. 저게 뭐지? 딱딱한 것, 털이 없네, 꼬리도 없네, 회색의 그것은 게였다. 땅게다. 물에 살아야 할 것이 어쩌다 땅에 저렇게 머리를 파묻고 있나 불쌍도 하다. 다리를 정신없이 움직인다. 흐물흐물한 저물녘 빛도 땅게에겐 타들어 가듯 강렬했을 것이다. 땅게를 잡은 미야와 나는 흙을 툴툴 털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왔다. 잡은 땅게를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홀가분한 마음만 한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