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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바름 Dec 24. 2021

햇빛 햇빛

-약간은 동화, 조금은 에세이

햇빛, 햇빛     


해도 때 묻은 자갈돌을 입으로

핥으며 제 새끼 어루듯 어루는 햇빛,

햇빛들 노는 모습 눈에 선해라!     


이성복 『남해 금산』‘햇빛, 햇빛’ 중     


 어릴적 홍역을 앓던 끝무렵, 언니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부모님은 모두 일터로 가고, 나만 혼자 좁다란 방에 누웠다. 앞 베란다와 방이 붙어 있어서, 문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었다. 열은 많이 내렸다. 어젯밤 엄마는 곧 내가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둠 속에 손전등을 비추듯, 햇빛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코끝을 간질이고 지나갔다. 발치에 걸린 구구단 벽보를 보며 4단쯤에서 막혀 '사오 이십, 사육 삼십육' 머릿속에서 숫자가 엉터리로 맴맴 돌았다. 지루하던 참에 햇빛이 놀자고 했다.     


"암 데도 가지 마라"


엄마가 당부했지만, 사발에 담긴 물을 꼴깍 마시고 나니 엄마 말도 잊었다. 햇빛을 쫓아 빌라 철 대문을 삐걱 열고, 열쇠로 문을 잠그고, 늘 하던 대로 편지함에 열쇠를 숨겼다. 복도 계단에도 햇빛이 가득했다. 1층으로 내려가는 철제 난간 사이사이 빨갛게 녹슨 데를 오롯이 비추며, 깨진 유리구슬과 종이 딱지와 콩나물 대가리가, 뭉쳐진 먼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청운빌라’는 산복도로 꼭대기에 자리해, 어딜 가든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주위가 고요하다. 친구도 없이, 학교 가던 길을 따라가려니 영 재미가 없다. 언젠가 언니를 따라 넓은 운동장이 있고 그 앞에 빵집도 있고 통닭집도 있는 옆 동네에 가본 적이 있다. 미용실, 밀면집, 얼음집을 지나 고등학교를 하나 지나, 좀 더 걸어가면 나오는 동네였다.


 걸으면 삑삑 소리가 나는, 내 발보다 한 뼘은 작은 슬리퍼를 신고 나선 참이라, 나는 걸음이 느리다. '삑삑' 대신에 '피슉 피슉'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슬리퍼 어딘가 구멍이 난 게 틀림없다. 분명 햇빛이 놀자고 해 나왔는데, 간질간질 부드럽던 녀석은 사라지고 얼굴을 콕콕 따갑게 하는 뙤약볕만 따라온다.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갈까, 조금 더 가볼까 망설이는 사이, 누가 놀다 두고 갔나? 돌멩이 공기가 길가에 부려져 있다. 쭈그리고 앉아 한참 공기를 하고 논다. 보는 눈이 없으니 5단까지 순식간에 하고, 재도 술술 넘는다. 언니나 친구들이랑 할 때는 1단을 못 넘겼다. 잘하지 못한다고 맨날 깍두기만 시켜 속상했는데, 요술처럼 잘 풀리는 공기다. 손등이 따끔거리도록 공기를 한다. 다리에 쥐가 난다. 침을 묻혀 콧등에 대봐도 소용없다. 찌르르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쥐 녀석에 눈물이 찔끔 난다.


순간, 내가 걸어온 방향을 잃었다. 눈앞에 빨간 대문집과 담배 가게가 보이는데, 낯설고 모르는 동네다. 목이 마르고 겁이 덜컥 난다. 지나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묻는다.     


"청운빌라는 어디로 가야 해요?"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니? 쯧쯧쯧 길을 잃은 거야?"    


나는 맥없이 머리를 푹 숙인다.     


"저쪽 건널목 조심하고 곧장 걸어가라"


나에게 무작정 놀자고 한 햇빛이 밉다. 하지만 조금만 서두르면 엄마가 돌아오시기 전, 대문을 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초롬하게 누워있을 수 있다. 구구단을 5단까지 다 외웠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피슉 피슉’ 소리 나는 슬리퍼를 끌고, 청운 빌라를 향해 달리다시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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