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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바름 Feb 04. 2022

내 귀엔 바람 소리만 쌩쌩

약간은 동화, 조금은 에세이

 내 귀엔 바람 소리만 쌩쌩     


 차례 상을 물리자 나가서 놀라는 어른들 말에, 사촌 동이와 나는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동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큰 집의 귀한 막내아들이다. 큰 엄마가 나를 한 번 쓱 보더니 동이에게만 작고 노란 바나나를 쥐어줬다. 녀석이 내 앞에서 바나나 껍질을 삭삭 벗겨 혼자 꿀꺽 했다면 다시는 녀석을 안 볼 생각 이었다. 동이는 바지 주머니에 바나나를 불룩하게 넣고 새로 산 자전거를 끌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언제 바나나를 꺼낼까 나는 운동장으로 가는 내내 동이의 주머니만 뚫어져라 봤다. 운동장 한 가운데 이르러서야 동이는 자전거를 ‘탁’하고 멈췄다. 주머니에서 꺼낸 바나나는 한 귀퉁이가 살짝 눌러졌지만 여전히 먹음직 했다. 선물 포장을 뜯듯 조심스럽게 동이는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먹더니, 나머지를 나에게 넘겼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약간 떫은 낯선 맛이다. 엄마 없이 큰 집에 오면 나는 늘 어쩔 줄 몰라 눈칫밥만 잔뜩 먹었는데, 바나나 한 입이 설움을 녹였다.


 화장품 장사는 명절 대목에 이 집 저 집 수금 다니랴, 고무장갑이나 수세미 등 판촉물 나눠주며 새 물건 팔랴, 정신없이 바빴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아빠와 나는 늘 짝꿍이 돼 시골 큰 집으로 갔다. 큰 집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듣는 소리는 늘 같았다. 이번에도 엄마는 같이 안 왔냐는 소리, 그 동네 돈은 혼자 다 버냐는 소리, 그리웠다 보고팠다 보다는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난 큰 집 문지방을 넘었고, 많이 컸다는 그저 그런 어른이 건네는 그저 그런 말끝에 항상 니 이름이 숙이냐 정이냐 언니들 이름을 쭉 부르고는 나는 모르겠다며 자기들끼리 쑥덕대다 마는 그런 상황, 결국 나는 내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빨간 얼굴을 푹 숙이고 동이만 찾았다. 동이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어른들이 건네는 용돈도 척척 주머니에 넣고, 벌어진 화투판 옆에서 아양을 떨며 식혜도 받아먹고 곶감도 먹고 했다.     

 

 동이의 새 자전거는 길이 덜 들어 페달을 빡빡 밟아야 했다. ‘치릉 치릉’ 경쾌한 소리 대신 ‘철컥철컥’ 영 새 것 태가 안 나고 헌 것 같다. 자전거를 타 본 적 없는 나는 새 것이라 해서 부러운 마음이었는데 낑낑대며 타는 동이를 보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달리다 멈추고 달리다 멈추고 이러다 아예 고장이라도 날까 걱정이다.     


“뒤에서 한 번 밀어봐 쭉쭉 좀 달리게”


“민다고 되겠냐? 니 자전거 영 헌 걸 속아서 샀나 봐”


“야! 헌 거라니......완전 쌔 거야.....작은 아빠는 이런 것도 못 사주지?”


“너!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리고 여기서 울 아빠 얘기가 왜 나오냐?”


“하긴 작은 아빠 드센 너희 엄마 땜에 기도 못 편다고 울 엄마가 그러더라”     


못된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분한 마음을 삭이며 자전거를 밀었다. 놀이가 끝나면 큰 집으로 가야하고 공식 귀염둥이 동이 옆에만 붙어 있어도 나는 덤으로 넘어오는 어른들의 정 어린 눈길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운동장 서너 바퀴를 달리고 나니 자전거가 꽤 탈만 해졌다. 동이가 웬일로 나보고 타보라 한다. 두 발을 페달에 얹고 둥둥 뜨듯이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긴 하다. 겁이 나지만 페달에 발을 얹는다. 한 쪽 발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서 있다. 관두라는 동이 표정, 나는 땅에서 발을 뗀다. 후들후들 떨린다. 동이가 뒤에서 잡아도 소용없다. 지그재그로 달리던 자전거는 쾅 하고 넘어진다. 깔깔대는 동이를 보니 오기가 생긴다. 번쩍 털고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는다. 이번엔 조금 더 멀리 달리다 넘어진다. 내 자전거 다 망가지겠다고 동이가 투덜대도 몇 번을 달리고 넘어지길 반복 한다. 더는 뒤를 잡아 줄 수 없다며 동이가 손을 확 떼는 순간, 자전거는 훨훨 날듯이 바람을 가르며 멀리 철봉이 있는 데까지 달린다. 눈이 시원하다. 속도 시원하다. 큰 집 말고 엄마가 있는 우리 집으로 가고 싶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잡아!”     


동이가 쫓아오며 뭐라고 외친다. 내 귀엔 바람 소리만 쌩쌩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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