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커피와 담배
"커피 주세요 담배도 주세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정은 작가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
이 책은 솔의 선물이었는데, 본인이 먼저 읽고서 아주 강력히 추천해 주었다. 사실 표지와 제목부터 딱 내 취향일 것 같더라니, 정말 그러했다. 카페 알바 중에 읽기 시작해서,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었다. 그 정도로 술술 읽히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문체였다. 기억에 남는 구절들이 참 많은데, 오늘 단 한 문장만 꼽으라면 이 문장이다.
"혹시 내가 이해해달라고 했나요?"
작가는 자신이 들은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이라고 소개했고, 나에게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아주 뜨끔한- 말이었다.
"나는 그를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었다. 그게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의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뒤다. 그가 바란 것은 이해가 아니라 그저 존중이었던 것 같다.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존중하지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듯이 좋아하지만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이해와 존중은 다르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여태껏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짓는 표정의 미묘한 차이, 상대방의 기분 등을 잘 캐치하는 것이 내 능력이라고 생각했건만. 나를 이해하기보다 남을 이해하려는 생각 구조를 가져온 탓에 아프지만 귀중하게 얻어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내 식대로 이해하려 했을 뿐, 그 자체를 존중하고 있었는지 되물어본다면 아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안다는 것에 지닌 함정을 경계해야 했다. 타자를 모두 파악할 수 있다는 건 나의 착각일 뿐, 내 시선에 가두어 볼 때 폭력이 시작될 수 있다. 가깝고 소중한 관계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존중'은 이 짧은 음절 안에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 같다. '이해'라는 건 애를 쓰면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내 식대로 상대를 생각하고 상황을 재단한 채로 이해해버리는 것은 권장하지 않지만 마음은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존중은 수용과 같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가능한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연인으로 나오는 K의 생활방식을 따라 금연, 금주, 채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금욕이 싫은 자신을 발견하고, 금욕적인 그가 미웠다고 말한다.
"그가 한없이 깨끗하게 느껴질수록 나 자신이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가 해낸 것들을 나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고통스러웠고 그것은 다시 칼날이 되어 그에게로 겨눠졌다. (...) 그는 그저 그 자신으로 살고 있을 뿐인데, 나는 지금까지의 내 모든 삶이 모독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
내가 존중해야 하는 대상이 만약 나의 욕망과 이해관계와 대치되는 상황이라면,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을까. 존중은 쉽게 쓰이지만 사실은 아주 묵직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본인의 한참이 지나고서야 어리석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정직하게 대면하고 맨얼굴을 드러낸' 이 글이 오히려 대단해 보였다고, 애초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이렇듯 작가는 본인이 걸어온 삶에 대해 차분하게 써 내려간다. 본인이 '절박하게 좋아하는' 커피와 담배와 함께. 농도 짙게 본인의 삶과 좋아하는 것을 꾹꾹 눌러 담은 탓인지, 기억력엔 영 자신 없는 나에게도 생각나는 에피소드와 구절이 많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을 노래하다 일찍 죽은 음악가들한테 남은 삶에서 하루씩이라도 떼어다가 바쳐야 한다고(...) 그러니까 매력적인 건 그가 아니라 그때 들었던 음악이라고. 그때 음악을 들으면서 같이 피운 담배 때문이라고." - <분위기에 반하다>
"카페 직원들은 카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투명 인간이라고 여긴다." - <과테말라와 파나마>
"불성을 얘기하고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성추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 <절에서 피우는 담배>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을, 감정을 잠시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 <은하수>
책을 다 읽고 나서의 감정은 딱 커피와 담배 같았다. 묵직하고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구석이 있었다. 나의 커피는 어떠했고, 나의 담배는 어떠했는지. 생각에 잠겨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길지 않으니, 한 호흡에 끝까지 다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커피와 담배로 풀어나가는 작가의 삶(의 단편들)을 읽어나가다, 마지막 챕터 <커피와 담배>를 만나면 묘하게 신기한 느낌을 받는다. 솔은 이 챕터로 인해 앞단의 이야기들이 다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모호해지면서도 '그게 더 이상 중요한가?' 싶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그게 중요한가? 싶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데, 결코 아무것도 아니진 않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말들의 흐름' 첫 번째 책이다. 끝말잇기처럼 기획된 시리즈라는 점이 꽤 흥미롭다. 지인이 추천해 준 '연애와 술'도 조만간 읽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