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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Apr 10. 2024

험난한 소풍

언제든 네가 돌아볼 수 있도록 여기 서 있을게

아무리 이상기후가 판을 쳐도 봄은 온다. 서서히 풀리던 날씨는 이제 최고기온이 20도를 웃도는 따뜻한 봄날로 바뀌었다. 봄이 오는 표시는 거리에서부터 티가 난다. 메마른 가지에서 알록달록한 봄꽃이 터진다. 팝콘처럼 흩날리는 벚꽃잎에 마음이 동한다.  

    

우리 꽃놀이 갈까?     


친구의 제안에 마음이 덜컥 동했다가 이내 걱정으로 사그라졌다. 정말 무강이와 꽃놀이를 갈 수 있을까? 온 사람들이 다 나올텐데. 사람 뿐 아니라 개도 엄청 많이 나올텐데. 게다가 처음 가보는 길이라 더더욱 흥분할 게 분명할텐데. 사람과 개가 많은데 길까지 초행길이라면 무강이가 흥분할 가능성은 거의 100%다. 그래도 팡팡 터지는 봄꽃의 유혹은 강력했다. 봄이 다 끝나기 전에 예쁜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그래, 가보자! 이런 산책도 한번쯤은 해봐야지! 언제까지 도둑산책만 할 순 없잖아.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불안함은 치밀한 준비력을 가져왔다. 약속 당일 아침, 나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 공원으로 산책 방향을 정했다. 처음 가는 공원이었지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걸어가야 하는 우리의 특성상 거리는 1.3km 이내로 제한했다. 그보다 더 먼 거리는 나중에 돌아올 때 기운이 더 빠진다. 산책은 항상 돌아올 길도 생각해야 하는 법이었다.      


무강이는 생각보다 새로운 공원으로 가는 길을 잘 걸어주었다. 기분좋게 종종거리며 걷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지 꼬리 끝도 살짝 올라가며 나무 냄새 맡기에 열중하며 걸었다. 멀리서 다른 강아지가 오면 미리 내 옆에 붙어 서게 했다. 착 앉아서 집중도 너무 잘해주었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새로운 길을 걸으면 항상 줄을 당기고 헉헉대며 거친 숨을 내뱉던 상여자가 이렇게 조신하게 걸어주다니! 제발 이따 낮의 약속에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길 기도했다.      


드디어 대망의 약속 시간이 왔다. 간식과 물을 든든히 챙기고 집을 나섰다. 아침과 달리 해가 한 가운데 뜬 하늘은 꽤나 더웠다. 외투도 벗고 나왔지만 금방 땀이 났다. 다시 나온 산책로엔 아침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걷고 있었다. 다행히 무강이는 아침과 비슷하게 내 옆에서 잘 걸어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멋있다며 칭찬을 던졌다. 쑥스럽게 웃으며 계속 걸었다.      



“무강이!”     


멀리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 무강이는 황소처럼 달려갔다. 엄청난 힘으로 순식간에 친구에게 점프해서 입을 맞춘다. 그래도 반가움이 풀리지 않아 낑낑 울며 온 몸으로 인사했다. 친구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며 마구 만져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강이는 친구에게 온 몸을 비벼 개털을 선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친구의 옷은 털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상관없다며 얼른 그늘을 찾아 앉았다.      


인간 둘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무강이도 진정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처음 와 보는 공원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멀리서 줄넘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소리지르는 아이들, 줄 없이도 할머니를 잘 따라다니는 작은 강아지들, 지근거리에서 먹을 것을 기대하며 날아다니는 비둘기들까지. 특히 비둘기는 너무 가까이 와서 무강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고 싶어서 몸을 움직여보지만 내가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결국 무강이는 그늘에 있는 내내 주변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보느라 바빴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움직여보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내 걱정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 이상하게 무강이는 나나 남편이 혼자 데리고 나가면 잘 걸어 다니는데 둘 이상의 사람이 있으면 흥분도가 두 배 이상 뛰어오른다. 그래도 기왕 나온 꽃놀이를 포기할 순 없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지만 사진을 남겨야 이 만족감이 더욱 오래 갈 거다.      


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 공원이라 생각보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한 공원 구석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무강이도 사진을 찍는데 큰 거부감이 없다. 강아지와 함께 사진을 잘 찍고 싶다면 기다려 훈련을 열심히 해 놓으면 도움이 된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꼬리가 휘어지는 찰나의 표정을 잘 잡아서 찍으면 훌륭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마음껏 사진을 찍고 드디어 티타임을 가져보기로 했다. 미리 전화해 놓은 카페로 향했다. 무강이와 함께 살고 나서부터 내 성향이 조금씩 J형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뭐든지 현장에서 그때 그때 유동적으로 정하는 즉흥적인 P형이 강한 성향이었는데, 무강이와 함께 다니다 보면 현장에서 퇴짜를 받는 일이 부지기수다. 제주도 여행에선 너무 많이 퇴짜를 받아서 결국 무강이를 차에 두고 급하게 식사만 하고 나오기도 했다. 그 이후 우리는 무강이와 여행을 갈 때 대부분 포장을 해서 숙소에서 먹는 방식을 택한다.      


이번에 가는 카페 역시 새로 가는 곳이다. 10분 정도 걷는 내내 무강이는 계속 뛰어다녔다. 팍팍 튀어나가 냄새도 맡아야 하고 멀리 지나가는 오토바이도 신경써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내 팔은 떨어져나갈지언정 무강이가 무사히 카페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겨우 도착한 카페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동네에 있는 카페이고 주말이라 한산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작은 테이블 하나만 겨우 남겨놓고 있는 카페에 대형견이 들어서니 다들 동요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우리는 목례를 연신 꾸벅꾸벅 던지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손님들이 자리를 양보해주어 조금 쾌적하게 앉을 수 있었다.      


무강이는 여기서도 친화력을 발휘했다. 카페 안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따뜻하다는 걸 눈치채고 바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구석구석 자신의 꼬순내를 전파하고 간식도 많이 얻어먹었다. 소풍이란 바로 이 맛이지.      


아직 소풍은 끝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 역시 험난이 예고되어 있었다. 다행인 건 이제 친구와 헤어져 나와 무강이 단 둘만 걸어가면 된다는 사실이다. 조금 안심하며 걷고 있는데 무강이가 마구 짖었다. 얼른 무강이를 앉히고 주위를 둘러보니 휠체어를 탄 어르신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맞다. 무강이는 살면서 휠체어를 본 적이 없었다.      


휠체어에 시선을 고정하고 헉헉 거리는 무강이를 기다려주었다. 무강이는 흰자가 보일 정도로 고래 눈을 뜨다가 점차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옳지, 간식 하나를 준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박동도 조금씩 낮아졌다. 거칠었던 호흡도 얌전해졌다. 까만 눈동자에선 흰자와 핏발이 보이지 않는다. 무강이의 진정된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무강이에게 낯선 것들이 튀어나온다. 매 순간이 그랬다. 즐겁게 놀다가도 낯설고 이상한 것이 튀어나와 무강이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 때 나도 동화되면 안되다. 침착하게 버티고 서서 무강이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무강이가 낯섬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버티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마침내 험난한 소풍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거의 4시간을 외출한 셈이었다. 1시간만 산책해도 충분히 지치는 녀석에게 오늘은 아주 고된 하루였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엎어져 잠이 드는 무강이를 보니 저녁 산책은 안해도 되겠다는 묘한 게으름이 생겼다. 우리 다음에도 또 소풍가자. 그 땐 동네 공원보다 조금 더 멀리 가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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