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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Feb 10. 2024

240210 설 전날, 시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양가를 어떻게 다 챙기나 싶었고, 내 자유를 뺏기는 것 같았다.

어제 오후 한 시부터 여섯 시까지, 꼬박 다섯 시간 동안 명절 음식을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명절 당일 아침에 눈 비비고 시댁에 찾아가 아침을 얻어먹었다. 주방에는 못 들어오게 하셔서 수저 놓는 것 정도 겨우 거들었고, 주로 어머님과 남편이 식사를 차렸다. 식사 후에도 금세 쫓겨나 주방에 얼씬도 못 했다. 몇 차례 반복하니 염치도 없는 것 같고 민망해서 전이라도 부쳐 가겠다고 말씀드린 게 지난 추석 즈음의 일이다.


올해는 몇 가지 전에 잡채를 준비했다. 요리에 서투르기는 하지만 다섯 시간씩 걸릴 일인가, 그렇다면 여태껏 어머니는 어떻게 음식을 준비하신 거지 싶었다. 친정은 원래 명절을 챙기지 않아 음식을 해본 적이 없어 몰랐다. 보통은 명절 2-3일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셨다고 남편이 말했다. 준비만 2-3일 전부터지 명절 준비에 대한 부담은 그전부터 찾아왔겠지 싶었다.


결혼 전 남편이 어머니를 도와 음식 준비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혼 후 남편이나 내게 함께 도우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결혼 후 첫 명절에 어머니는 더 이상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고 가족 식사만 하겠다고 하셨다. 본인은 옛날 사람이라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지키며 살았지만 세상도 많이 변했고, 귀한 며느리에게 이런 부담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래서 명절에 우리는 시댁은 스킵하고 친정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님과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친정에도 여행도 가지 않을 때면 아침에 모여 식사하고, 커피숍에 가는 게 전부다.


어제 자기 전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이 고된 일을 힘든 내색 없이 함께 준비하자는 말씀도 없이 홀로 전담하신 게 죄송하고  고마워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결혼 후 몇 차례의 명절을 보내고서야 내가 스스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것 같아 또 고마웠다.


오늘 아침, 며칠 전 올라오신 친정 부모님을 역까지 배웅하고 시댁에 갔다. 어제 만든 음식을 꺼내니 이 힘든 걸 해왔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만두를 손수 빚으시고 여러 음식을 준비하신 걸 보니 오히려 민망하던데... 어머니의 음식에 전과 잡채를 더해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 또 주방에서 쫓겨났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부모님과 수다를 떨었다. 나를 주려고 샀다며 코트를 하나 주셨다. 나는 지난번에 찍은 가족사진으로 만든 액자와 달력을 드렸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고, 함께 커피숍에 가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그리고 남편을 집에 두고 혼자 또 커피숍에 와서 이렇게 글을 쓴다.


결혼하고 명절에 부담이 컸다. 양가를 어떻게 다 챙기나 싶었고, 내 자유 시간을 다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설에 친정 부모님이 올라오시니 동생 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고, 시댁에서는 나를 많이 배려해 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셔서 좋다. 가족 모임을 끝내고 혼자 커피숍에 오니 이 짧은 자유 시간이 너무 좋고 귀하다. 여전히 부담이 있기는 하다. 명절이면 가족에게 시간과 돈을 많이 쓰게 되니까.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번 명절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 봐서 너무 좋다고. 삶이 풍요롭다고 말이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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