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귀면서 다른 여자를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있던 그 남자
잠시 조금 더 오래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24살, 졸업을 앞둔 대학생 신분으로 그를 만났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잘해주었다. 근사한 곳에서 소개팅을 했고, 화이트데이에는 고급 초콜릿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저곳 인턴만 전전하던 취준생이었던 나는 자존감이 점점 무너져갔다. 무너져가는 내 자존감만큼 그의 관심과 애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휴대폰에서 우연히 본 카톡.
같은 과 동기(그는 대학원생이었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우리 행운의 여신님.”
“여신님이 와야 우리 팀이 볼링에 이길 수 있지.”
그 순간 연애를 끝냈어야 했는데, 어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남자에게 있었음에도 엉뚱하게도 그 여자 동기를 더 미워했다. 다시는 개인 톡을 하지 말아라, 단둘이 밥 먹지 말아라… 아무 효력도 없는 엄포만 놓았다.
그는 나에게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요구들도 했다. “높은 구두를 신으면 어때?” “이런 스타일 옷은 어때?”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내가 힐 신으면 너보다 커지지, 이 난쟁이 새끼야’라는 말을 삼키며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나는 남이 주는 상처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내 생일에 다른 건 필요 없으니 꽃다발 하나만 사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준비하지 않았다.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즈음 나는 그에게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다.
그리고 2주 만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네가 안 좋아졌어.”
그 말은 한동안 내게 트라우마가 되어 괴롭혔다. 매일 아침 꿈속에서 그 대사가 반복되었고,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으로 잠에서 깨곤 했다.
결국 그는 나와 헤어진 후 그 동기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소개팅을 주선해 준 지인이 같은 대학원 사람이어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와 헤어지고는 멀쩡히 학교도 잘 나왔다던데, 그녀에게 차이고 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게 상처받고도, 나는 한동안 혹시나 그를 마주칠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 대학가 근처를 맴돌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