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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y 08. 2024

'진지하게' 러너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세상 보수적인 몸뚱이에 부과한 운동시간 40분의 매직

'진지하게' 운동을 생각한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다가 초반부에 이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진지하게'. 참 오랜만에도 들어본다.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썼는가? 그는 자기 인생에서도

영화로 만든다면 잘라버리고 싶은 '흔해빠진' 일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이런 '흔해빠진' 일상의 반대되는 

단어로 그는 '진지하게'라는 언어를 썼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진지하게'는 생각보다 굉장히 구체적이다.


"내가 '착실하게 달린다'라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서 말한다면, 일주일에 60킬로를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킬로를 달린다는 것이다. 사실은 일주일에 7일, 매일 10킬로를 달린다는 것이다. 사실은 일주일에 7일, 매일 10킬로를 달리면 좋겠지만, 비가 오는 날도 있고, 일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는 날도 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달리고 싶지 않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리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는 날'을 정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0킬로,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라고 하는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진지하게'라는 단어에는 실행에 대한 계획과 그에 대한 실천이 다 포함되어 뼈와 살이 다 붙어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작품으로 치자면 이미 집필 계획서를 다 쓰고 상당 부분 작품을 써 내려간 상태라는 것이다. 출판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완성도와 작품성면에서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태도를 가진 분이 어떤 단어를 말한다고 할 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드문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그 조차도 어느 순간 '진지하게' 달리지 않게 된 순간이 왔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는  사는 일이 점점 바빠지고 매일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웬만큼 자유로운 시간을 내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 나이가 들수록 자질구레한 일이 늘어난다는 점. 마라톤보다는 트라이애슬론으로 마음이 기울었다는 점. 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느 시점에서부터 '달린다'는 행위에 어느 저도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1982년부터 무려 23년 동안 매일 쉬지 않고 달리고, 매년 적어도 한 번은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고, 세계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장. 단거리 레이스에 참여했는데, 어느 순간 달리기가 더 이상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는 순간이 온 것.

어쩌면 이전 까지는 매일매일 달리면서 또는 마라톤 경기를 거듭하면서 목표달성의 기준치를 조금씩 높여가면서 그것을 달성하는 데 따라 자신의 향상을 도모해 갔는데,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레이스 기록이

더 이상 향상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한다. 나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주자로서의 정점에 있다가 서서히 내려오는 그 순간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순간 자신의 3시간 40분의 기록에 못 미치는 순간이 오고,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4시간 대도 아슬아슬한 선에 가까워졌다. '나이 탓'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 수도 있지만,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무시하려고 해도, 숫자는 한 발 한 발 후퇴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순간에 다른 운동도 더불어 시도해 보지만, 그래도 '썰물이 빠지듯' 마라톤 기록이 후퇴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와 '달리는 일' 사이에는 그처럼 서서히 권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불할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있어야 할 문이 어느 정도 닫혀있다는 폐쇄감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주자의 우울'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가 40대 후반의 권태기를 넘어 50대 후반이 되자, 그 시점부터는 그냥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이스 기록을 단축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문득하면서 말이다. 그는 이미 나이를 먹었고, 시간은 정해진 만큼의 몫을 받아간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인 것이다. 강이 먼바다를 향해 흘러가듯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말하자면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이먹음에 따라 쇠퇴하는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기쁜 일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2장에서는 그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시점이 딱히 전업 소설가로서의 직업을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선택하게 되면서 비롯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딱히 출근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글을 쓰는 직업의 특성상 밖으로

나가 10킬로를 뛰고 온 다는 것은 일상의 '균형'에 가까운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그와 더불어 체력과 정신력을 동반해 강화시키는 훈련을 하고 스트레스를 버리면서 장기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가겠다는 각오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각종 문학상을 받으면서 스타로서의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 그의 재능이지만, 그 재능을 길게 이어서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체력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노력해 온 '운동'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음을 알게 했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사람의 완성된 모습을 보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쇼츠처럼 짧게 지나가는 그 장면과 감정은 사실 긴 인생의 수없이 반복되고, 노력해 온 경험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서는 수없이 많은 경험의 '순간'들이 존재하고, 그런 경험들이 결국 쌓여 자기 자신이라는 한 사람을 형성하는 것이다. 운동이나 공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참고서적을 보듯이 인생에도 경험부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일수록 시도해 볼 마음이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부정적일수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늘어난다. 사실 직업적인 운동선수가 아니라면 운동이 일반인에 극적인 드라마 같은 경험을 갖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다양한 운동을 경험하고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긍정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느리지만 자기에게 맞는 운동종목과 스타일을 찾게 해 주니 말이다. 현대인에게 운동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최대한 자기 자신에게 맞춘 '적합성'이란 게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항목 중에 하나가 '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2024년이 시작되면서부터 '진지하게'  운동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뭐 그전에도 그런 시도가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좀 많이 걸었으니 살이 빠지겠지 이런 정도의 사고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게 운동해서 발전 같은 것은 없었다. 살도 안 빠졌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살겠다는 마음이 들면 한번 과하게 운동해서 심하게 아프고 다시 그만두게 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타고난 '몸치'에 '운동꽝'인 내가 40이 넘어 다시 시도하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함부로 운동해서 쉽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대한 섬세하게 시작해서 오래가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쉬운 운동이라는 것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깨알 같이 체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에 10분도 좋고 20분도 좋았다. 어차피 남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니 내 기준에서 짧더라도 '자주' '횟수를 늘려' 지속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루틴'이라는 것을 찾아가면서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가장 적합한 운동이란 무엇인지 고민했다. 가령 집에서 간단하게 하는 유산소 운동이나 걷기를 뺀다면 내가 본격적으로 하는 운동은 '헬스'이고, 나는 나에게 가장 적합한 운동 시간이 주 3회 40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40분이라는 시간은 짧아서도 안되고 길어서도 안된다. 운동이 하기 싫은 날은 주야장천 러닝머신만 한 시간을 타고 오는 날도 있는데 사실 머신 앞에 있는 TV를 켜놓을 때가 대부분 그랬다. 처음에 운동하는 사람 입장에서 러닝머신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을 할 때 TV를 틀고 넋 놓고 보면서 걷는 것처럼 편한 일도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내 옆의 러너들은 대부분 귀에 에어팟을 끼고 하거나 블루투스를 끼고 달리고 있었다. 어차피 헬스장의 일부이니 텔레비전을 본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 하진 않지만 왠지 TV 나만 혼자 소음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설치 되어있는 텔레비전을 켜지 않게 되었다. TV를 꺼버리자 20분이라는 러닝머신 시간에 좀 더 신경 써서 걷게 되었다.  가령 초반 5분 걷는 속도 나머지 10분 걷는 속도, 마치는 구간 5분을 생각하면서 걷는 것, 심박수 최대 구간에 대해 신경 쓰면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TV를 보며 생각 없이 걷는 1시간이 생각만큼 나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전에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보고 나니 그렇게 운동해 온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기왕에 힘들게 운동하러 왔는데 10분이라도 가치 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넘게 러닝머신만 타고 있었던 나는 지난 시간 운동을 못했으니 그만큼 채워야 한다는 '보상'심리로 무작정 운동시간을 길게 잡았던 것. 정말로 말로 안되지만 내 옆에서 운동하는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뛰겠다는 쓸데없는 비교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만약 그런 식으로 루틴을 깨고 운동한다면 아마 그다음 날은 과부하가 걸려 운동하기 싫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기구운동도 세트 수를 무작정 늘리는 것을 포기했다. 1 세트를 하더라도 좀 더 신경 써서 하기로 했다. 모든 운동기구를 다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PT까지 받지는 못했지만 유튜브로 초보운동자들의 기구 사용법도 다시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이 헬스장에서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 스스로 깨닫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면서도 보수적인 것이 사람의 몸이다. 나는 우리 몸을 누군가 '설계'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분이 이과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몸의 대부분이 어쩌면 그토록 숫자에 관련되어 있을까.) 

40분이란 나 자신이 더 이상 흑화되지 않을 딱 그 정도의 마지노선이다. 그 이상 오버한다면 나는 정말 비뚤어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나머지 귀중한 시간들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쓰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진지하게'라는 단어가 가진 뜻의 의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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