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돼지 말고.. 바다 보러요..
지난 4월에는 정말 오랜만에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다들 이미 몇 번을 갔다 왔다는 제주도. 그러나 비싸서 이젠 다들 안 간다는 제주도, 기름 삼겹살 때문에 화가 나서 안 간다는 제주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바다가 너무 청초해서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렸다.
과거 이런저런 이유로 갔던 과거의 제주여행에 대한 기억. 말과 돌하르방 밖에 안나는 코스. 관광상품 구매, 용두암과 만장굴 기억뿐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진짜풍경을 가리고 있었나 보다. 이전에는 사람들과 관광코스를 따라다니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에메랄드 빛 아름다움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주에 관광객들이 줄어드는 바람에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만약 같은 장소 같은 풍경이라도 단체관광과 중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텅 빈 공간의 감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제주섬은 사람이 오거나 안 오거나 원래부터 아름다운 장소임을 새삼 알게되었다. 아름다운 섬에 아름다운 시설이 있으면 좋겠지만 섬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섬에 안 좋은 평가를 내린 다면 그것은 섬의 자연이 아니라 관광 산업에 대한 것이다. 섬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밀려오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았다거나 부동산이 급등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섬이 아닌가. 그렇게 오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았으니, 개발과 투자, 관광업으로 들끓던 이 섬이 좀 쉬었으면 좋겠다. 엎어지면? 뭐 그땐 그냥 쉬는 거다.. 그러다 또 일어나는 거지..
너무 오랫동안 삭막하게 살아서일까. 봄 제주에서 꽃과 감성이 넘쳤다. 그런 것 없이 산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지천인데 너무 자연스럽고 많아서 당연하게 보였다. 제주에서 누리는 건 비싼 카페나 액티비티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섬이 좋은 것은 무언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하루종일 자연 속에 있을 수 있 며칠의 여유 그 자체다.
작년 <빨간 머리 앤>에 관한 연재를 계속 썼었는데 그 꽃들을 보니 그녀가 떠올랐다. 꽃을 좋아하면 나이 든 것이라고. 촌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좀 나이 들고 촌스러우면 어떤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마저도 사라지고 나이 드는 것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앤 시리즈를 3권까지 읽고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앤 스스로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녀의 무한긍정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게 된다. 앤은 나이가 먹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늘 그녀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성숙해 가는 태도가 늘어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근본적인 모습은 독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좋은 쪽으로 일은 풀려나간다. 고아였던 앤이 가정을 만나고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고 학교를 다니고 선생님이 되고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이 스토리는 어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평범해서 더 감동적이라고 할까. 이 작고 깡마른 소녀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독립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니까. 자연이 주는 치유의 능력으로 마을 사람과 앤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숲과 자연을 보면 그 자체로 마음이 위로받으니 말이다.
여행 전 날씨를 체크해 보니 비 예보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떠나기 하루 전날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여행이 비로 인해 틀어질까 봐 걱정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둘째는 알레르기와 감기를 동반해 계속 기침을 해대는데 간신히 며칠 약을 받아오고 가기 하루전날까지도 치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계획의 몇 퍼센트만 하고 와도 성공이라는 마음으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 한번 타보고 싶다는 둘째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아이들은 전날 너무 떨려서 잠도 못 잤다고 하면서, 각자의 흥분 지수를 한껏 올려댔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너무 졸려서 잠이 든 건 나뿐이었다.
다행히도 도착한 날 다음으로 이틀은 비가 오지 않았고 3일째와 4일째 비소식이 있었다. 뭐 비가 오기 전까지소에 못 먹던 이 음식 저 음식 실컷 먹고 선인장과 야자나무도 실컷보고 바다 구경도 하면서 그럭저럭 즐겼다. 몇 군데는 계획에 틀어져서 못 갔지만, 관광객이 줄어든 탓에 별로 줄 서지 않아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한라봉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며 평생 못 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집밥과 배달음식만 먹던 사람에게는 제주도는 그야말로 먹을 거리 천국에 가까웠다. 조금 비싸긴해도 먹었을 때 처럼 돈 만큼 값어치를 못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대부분의 밥집이 음식이 정성스럽게 나왔고 양도 많았다. 음식이 너무 아깝고 맛있어서 정말 열심히 먹었다.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았나 싶을 정도로 가게 주인 분들도 친절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서 아이들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실컷 뛰어놀았다. 정원에는 나무로 미로 찾기를 만들어놓았는데 딸은 그곳에 그대로 반해버렸나 보다. "엄마, 제주도 진짜 살고 싶다..." 이런 말을 한 걸 보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이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온 날 공항에 앉아 기사 검색을 하는데, 제주 비계
삼겹살 이야기가 메인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 떠올려보니 그 전날 먹었던 고기가 기름이 많았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적당히 먹으려다가 찾아간 밥 집에
우린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깃집 하나로 제주도를 평가하기엔 좋았던 것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오메기 떡을 줄줄이 들고 나오는 중년 관광객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입도할 때나 돌아다닐 때는 몰랐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승강장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역시
제주도는 제주도네.. 이 말을 안 할 수 없었다.
큰 아이는 귀엽게 생긴 귤 모양을 키링을 흔들어대며, "우리 다음에 또 오자.. 꼭 다시 오자~" 이 말을
계속했다. 정말 재밌었다고.. 다음에는 귤탕후루와 한라봉 아이스크림을 꼭 먹을 거라며.
다음에는 바다를 좀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래. 직접 보고 듣고 먹어보는 경험이 진짜라는 걸. 비싼 숙소.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도..
아이들의 마음에 추억으로 남는다는 걸.
선입견 같은 것 없이 떠나 ~보자고.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