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가을은 항상 두번 온다. 광복절을 전후로 첫번째 가을이 마법처럼 찾아온다. 18년도 광복절이던가. 여름에 잠들었다가 가을에 일어난 적이 있다. 그 후로 광복절이 되면 내일 아침이면 가을일까 기대하며 잠들었다. 그럼 신기하게도 하루밤 사이에 계절이 바뀐 아침이 찾아왔다.
하지만 속으면 안된다. 그 가을은 속임수다. 여름의 집착이 끈적이고 질척인다. 낮만 되면 열기와 습기가 피부에 앉아있다. 난 다시 여름 속에 살며, 또 다시 가을을 기다린다. 오히려 한여름일때보다 더 간절하다.
두번째 가을은 추석에 온다. 하루아침에 아침을 선선하게 만들며 요란하게 찾아왔다 금방 꽁무니 빼버리는 첫번째 가을과 다르게, 두번째 가을은 은은하게 찾아와선 이 계절의 주인이 누구인지 존재감을 드러낸다. 카페에서 항상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따뜻한 라떼나 카푸치노를 고민하게 된다면, 그때가 진정한 가을이다.
가을을 좋아한다. 시간의 흐름을 온 감각으로 알려준다. 촉각이 첫번째다. 습기가 가시고 선선해진 바람이 피부에 맞닿는다. 청각이 두번째다. 미처 다 닫히지 않았던 창문 작은 틈 사이로, 웅-웅-하며 울리는 바람소리가 그 다음으로 가을을 알린다. 마지막이 시각이다. 잎을 떨구며 부피를 줄인 나무가 색을 바꿔갈때 즈음이면 한해가 저물어감을 실감하고야 만다.
시간이 흘러감을 감각할 때 비로소 반추의 시간에 흠뻑 빠진다. 반추란 지나간 것을 눈앞에 그리고 잡아보려는 시도. 결국 그 순간이 지금 내 앞에 없다는걸 알아차리면 그제서야 그리워지고 아련해진다. 무언가 텅 빈 쓸쓸함과 외로움을 곱씹기에 제격이다. 울적해지고, 차분해지고, 센치해질걸 알면서 그 감각을 제대로 느끼고 싶어 가을을 기다린다.
가을의 추위는 세지 않은데도 뼛속 깊이까지 서늘하다. 겨울의 추위는 매서워서 피부 표면부터 얼어붙게 만들지만, 가을의 추위는 말랑이는 피부는 부드럽게 통과하여 뼛속을 으스스 떨게 만든다. 껴입는다고 따뜻해지지 않고, 어디에서나 서늘함이 맴돈다. 그러다 카페에서 깊고 진한 원두향을 맡으며 따뜻한 커피(아메리카노든, 라떼든 상관없다)를 마시면 그제서야 따스함이 채워진다.
두번째 가을이 조용히 오고있다. 가을의 센치함을 즐긴다고 했더니, 나보다 한 15살쯤 많으실 선생님께서 그 때는 그래도 된다고 하셨다. 조금 더 나이들면 센치함이 부끄러워질까. 시간이 속절없음을 외면하고 싶어질까. 그렇다면 더더욱 기록해야지. 이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면 더더욱 남겨둬야지. 이 나이의, 이 계절의 고유함을 언젠간 또 곱씹겠지. 또 한번의 가을을 맞이하며, 나뭇잎 단풍이 물들듯이 파란 하늘 하얗게 수놓듯이 그렇게 가을을 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