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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윤호 May 31. 2022

[소설] 바다와 창문 틈 빛

20220528

 어릴 적부터 꿈꾸던 이상적 형태의 사랑은 아가페(αγάπη)였다. 희생적 사랑, 무조건적 사랑, 절대적 사랑, 신이 우리에게 건네는 사랑….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심지어 혐오한다. 나는 항상 후회하며 반복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사랑의 가치를 고민하던 나와 달리, 많은 이들은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 자랑할 때, 그의 능력과 벌이, 권위와 재물, 얼굴과 몸매를 얘기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정신적 사랑에 대체한다. 그런 사랑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을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사실 인정하기 힘들다. 아니, 나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용납하고 싶지 않다. 상대방의 정신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미숙한 자들의 헛소리라고 되뇌지만, 내가 사회적 기준에 미숙하고 철없는 놈일 수도 있겠다. 


 정신적 가치, 본연의 아름다움이니 말은 쉽다. 볼 수 없으니 어찌 그것을 판별하겠는가. 선(善)과 악(惡), 미(美)와 추(醜)는 너무나도 애매하고, 간혹 주관적이다. 사실 나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고민이 부족한 얕은 철학이 허공을 휘저을 뿐이다. 만약 정신을 판별해낼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말뿐인 사기꾼이 아닐까도 싶다. 물론 정말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마 그에게 흠뻑 사랑을 쏟을 테다.     


 잠시나마 나는 한껏 사랑을 쏟은 적이 있었다. 년 단위로 꽤 오래 사귀었던 그도 아니다. 몸만으로 음취했던 그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그는 사랑을 제대로 판별할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천천히 슬퍼하던 두 달간의 대화였다. 나는 그 쓸쓸함을 가장 사랑이라고 여긴다.


 먼저 대화를 건넨 그는 나를 항상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나는 그가 딱히 싫지 않았다. 일부러 과장하며 활기차게 행동하지만 무언가 파랗던 그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겨울날 홀로 간 동해안의 이름 없는 해변가에서 본 바다 같았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다. 아니 창백하달까, 핏빛이 보일 듯 간혹 새빨갛다. 연예인들이 무대를 위해 하얗게 가꾼 피부 같기도, 영화 속 스웨덴 소녀 같기도 했다. 거기에 둥근 안경을 꼈는데, 시력이 나쁘지는 않은 듯 범생이 같이 눈이 작아 보이지는 않았다. 꽤 귀여웠다고 느꼈다. 간혹 집중하는 고양이처럼 눈동자가 특히 어두워질 때가 있었는데, 그가 홀로 가만히 있을 때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그가 심한 우울증을 겪는 아이란 것을 알았다. 전화번호 때문에 자동으로 뜬 SNS 비밀 계정을 팔로우했는데, 다행히 맞팔을 해주었다. 그의 게시물은 항상 뭔가 비슷하고 기괴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희미한 달빛을 조명으로 자기 자신을 찍어댔다. 나는 그것을 어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작품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그의 슬픔을 멀리서나마 공감하며 경외했다.

 타인에 관심을 줄 여력도 없던 내가 그때부터 그를 세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의 손목에 흉터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피와 깊은 상처를 무서워해서, 그의 상처를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나를 자세히 보았는지, 언제부턴가 항상 얇은 긴팔 셔츠를 입고 다녔다. 나는 그의 배려를 감사히 여겼다. 자기 파괴에 심취하며 그것을 드러내지만, 선하고 사람에 대한 배려가 넘쳤다. 모순적인 사람이었고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턴가 매일 함께 전화했고, 한 주에 한 번은 그와 길을 걸었다. 여기저기 모험하듯 여행을 떠났고, 이것저것 주제를 정하며 이야기했다. 차츰차츰 나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산 그의 세계에 흥미를 느낀 거 같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사랑했다. 안타깝게 자작곡은 만들 능력이 없어 그의 감정을 본연이 드러낼 수 없었지만, <새소년의 난춘>과 <박소은의 일기>를 좋아하며 자주 불러댔다. 그와 가장 닮은 곡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위로해주려 그를 상상하며 곡조 없는 가사 하나를 선물해줬다. 그때 그는 정말 기뻐했다. 자기 맘대로 부르며 항상 달라지는 곡이었지만, 매번 같은 가사라며 웃어댔다. 언젠가 그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빌딩가 지하 1층 계단에 앉아 노래를 불러댔다. 지나가는 시민도 없었고, 여기는 훔쳐갈 게 없는지 경비원의 담당 구역도 아니었다. 나는 어둡고 좁은 계단 사이 달처럼 빛나던 그의 무대를 보며, 매니저가 되거나 엔터사를 세울 상상까지 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아름다움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내가 본 어떤 무대보다 처절하게 애원하듯 구슬펐고, 공허하게 떠나듯이 덧없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토한, 정말 감정을 다 한 그의 아름다움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그의 노래를 듣다 보니 막차를 놓쳤다. 5호선 광화문역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잠을 구해야 하지만 둘 다 교통비 정도만 있는 빈털터리였다. 옆에 노숙자 둘을 제치고 그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 모서리 즈음에 함께 앉아 머리를 맞대고 새벽을 보냈다. 따스하다는 일기예보를 믿지 않고 두꺼운 점퍼를 갖고 오길 잘했었다.     

 그렇게 나는 한두 시간을 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깼다. 그는 담배 한 모금을 원했는지 밖으로 나갔다. 졸린 눈으로 이제는 내가 그를 따라갔다. 담배 피우는 것을 들켰는지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았다. 나 역시 담배를 질겅 물었고 콜록거리며 광화문 광장을 지켜봤다. 세종대왕상, 이순신 동상, 그리고 울부짖던 사람들의 노란 텐트. 우리는 그곳을 참 좋아했다. 이전부터 자주 놀러 온 산책 거리. 웃음 지으면 몇 배로 웃음을 받아주는 사람들, 아파하면 몇십 배로 아파하는 우리.

 콜록대는 나를 보고 배시시 웃던 그가 나에게 대뜸 말했다.

 "오빠 오늘은 너무 행복해서 키스하고 싶었어요."

 나는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행동할지 나의 온갖 경험에 비추어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멈칫하다 어떻게 된 건지 그에게 입맞춤했다. 짧고 가벼운 입맞춤. 그리고 첫차까지 역전 모서리에서 함께 곤히 잠이 들었다.     


 첫차를 타고 그와 왕십리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서울보다는 수도권에 살기 때문에 한참을 더 가서야 집에 도착했다. 들떠있던 나는 방안을 멍하니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빨지 않아 눅눅한 이불, 어질러져 밟히는 옷가지들 사이 ‘존 메설리’의 <인생의 모든 의미>라는 책,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라는 장이 펼쳐져 있었다. 한참 지난 후 다시금 나를 발견했다.    


 ‘나는 아직 변하지 않았구나.’     


 사실 나 역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쓸쓸한 바다와 같은, 밤하늘 달빛과 같은 그에게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한 달 넘게 들었던 그의 삶과 어제의 일, 그리고 나의 상황을 날을 새며 찬찬히 생각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는 나를 좋아했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우울에 깊숙이 빠지는 우리는 우리를 구할 수 없었다. 나의 능력과 벌이, 권위와 재물, 얼굴과 몸매….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없었던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나 홀로 자주 울어댔다. 이로 나타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시선에 대한 두려움, 불안. 나는 이곳과 이 시간을 절대 원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나보다 더 심한 우울 속에 살고 있었던 아이였다. 학대와 버려짐, 선택하지 못하는 삶. 빚더미에 벗어나기 위해 알바에 전전하고, 빛이라고는 노래밖에 없는 삶. 그래서 나는 그가 두려웠다. 빛이 드는 창문에 커튼을 쳐 공간과 시간마저 어두운 세계. 그는 '악'에서 온 ‘아름다움’이었다. 소설 <데미안>에서 말하는 '아프락사스'가 가장 비슷한 표현일까? 아니, 그는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이었다. 하지만 신 또는 악마처럼 나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를 상상하면 인간의 삶보다 신과 악마의 죽음이 먼저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더 관계를 발전하지는 말자"

 나의 말에 당황한 그는 나에게서 멀리 도망쳤다. 나 역시도 그가 완전히 나를 떠날지 몰랐다. 그저 한 발짝 떨어지면, 우리 모두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아프지 않게 행복하게 기쁘게 사랑할 텐데.

 아무 연락도 할 수 없는 그를 생각하며, 후회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현재, 나는 그토록 바라던 회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우울증 약도 건강 보조제 정도로 가끔 먹으며 충분히 생활할 수 있고, 나와 세상에 대한 희망, 사람에 대한 인정, 내 공간에 대한 행복, 시간에 대한 열의를 가지며 살아가는 당당함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도 될 강직함도 생겼다. 힘들 때는 글을 쓰고, 악기를 만지며 감정을 정돈한다. 무엇보다 나의 감정과 상황을 곧이곧대로 인정하게 되었다. 우울 분노 행복…. 이제는 예민하고 깊은 감정을 어떻게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스리는지 알았다. 오히려 사랑을 애원하지 않는 지금, 아픈 사랑이 불현듯 생각났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지 못했고, 우리를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그를 추억한다. 그가 뭐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만약, 만약에 그가 힘든 시기에도 잘 살아내고 있다면

 "잘 겪어내서 정말 고맙다."

 라고,

 "두려워 떠나서 정말 미안하다."

 라고 말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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