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에게도 룰이 있다

인간보다 오래된 생명들의 철학

by 괜찮은 작가 imkylim

하와이의 주조(州鳥)는 ‘네네’라고 하지만 나는 하와이의 대표 새로 닭을 꼽겠다.


야생닭(red junglefowl)은 폴리네시아인이 하와이에 정착할 때 함께 들여왔다. 약 6,600만년전, 백악기 팔레오기의 대멸종에서 살아남은 수각류 공룡의 혈통이 타조, 에뮤, 키위, 오리, 닭, 기러기 등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포함되는 닭이 red junglefowl이다. 닭의 야생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2년 허리케인 이니키로 사육장이 무너지며 탈출한 양계닭이 야생으로 풀려나왔다. 이제 그들은 야생닭과 함께 대자연을 누비고 있다. 하와이 길거리에서 보는 닭은 야생닭 내지는 양계닭과 섞인 반야생닭이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거리낌없는 짝짓기 덕인지 녀석들 깃털에는 윤기가 돌고 색감이 화려하며 다채로웠다. 수컷의 꼬리는 한국에서 보던 닭보다 길고 탄력있어 보였다.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 덕인 듯했다.


서울의 비둘기에 비할 정도로 하와이에 닭이 많은 것은 닭을 괴롭힐 뱀 같은 천적이 없으며 사람들도 야생닭을 잡아먹지 않아서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운동을 많이 해서인지 너무 질겨서 먹을 수도 없단다. 게다가 날씨는 항상 따뜻하고 먹을 것이 넘쳐난다. 행복하게 사는 존재답게 녀석들은 제각각 늘씬하고 잘생겼으며 건강미가 넘쳤다. 걷는 모습이 하도 위풍당당해서 어디에서도 기가 죽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6,600만년 넘게 살아온 야생의 역사만 봐도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것이었다. 고작 700만 년 전에 등장한 인류가 어찌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닭을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본 건 칼랄라우 밸리 가는 길에 있는 잔디밭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가이드가 말하길,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바닥에 쏟으면 닭들이 몰려와 깨끗이 치워줄 거라고 했다. 가이드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닭은 먹거리에 대한 선호가 뚜렷했다. 밥과 생선튀김, 고구마, 망고 과육은 잘 먹지만 레몬, 생강 절임, 바나나 껍질, 망고 껍질은 외면했다. 치아가 없고 부리로 쪼아 먹어야 하니 질긴 음식은 피하는 듯했다. 그래서 녀석들이 남긴 음식은 다시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했다.

아무튼, 나는 닭대가리라는 말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닭들은 우리가 식사하기 위해 피크닉 테이블에 앉자 슬그머니 다가와 서성였다. 식사를 훼방 놓지는 않았다. 가끔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듯 푸드덕거리고 자기들끼리 오늘 도시락 메뉴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남은 음식을 바닥에 쏟을 때가 되어서야 몰려들었다. 단숨에, 살벌하게 달려들어서 서로 음식을 먼저 차지하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다 먹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하게 흩어졌다. 각자 딴 데 보며 모르는 척 트림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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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서로 경험을 주고받아 공통의 규칙을 만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롭게 인간의 음식을 받아먹으려면 일단은 참견 말고 기다리는 게 좋다고. 이건 닭이 절제와 타이밍 감각, 상당히 우수한 지능을 지녔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뿐 그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내는 소리는 20가지가 넘는다고도 한다. 또한 서열과 얼굴을 100마리까지 기억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사람도 개인별로 기억력과 어휘 수준이 다르니 모든 닭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모이를 쪼다가 자꾸 주변을 살피는 어수선한 태도 때문인지 우리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도 닭대가리 비슷한 표현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산만함이 아니라 현재를 읽는 즉각적 감각성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그게 있기에 기나긴 진화의 세월을 살아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히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건만 닭대가리라고 하는 건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편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곳 닭들의 꼿꼿한 자태를 보면 그런 비웃음쯤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한마디쯤은 할 수도 있겠지, 늬들이 뭘 알겠니. 꼬끼오.


반즈앤드노블에 들렀을 때 local interest 코너에서 KAUAI ROOSTER stories and other tropical tales라는 책을 봤다. 거기에는 닭이 난다는, 그것도 기러기처럼 몰려다니며 비행하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있었다. 동화 속 허구였지만 처음 식사한 식당 MOKU에도, 하나페페 마을에도 닭 그림이 많았던 것처럼 닭은 하와이의 생태, 역사, 문화의 일부인 듯했다. 그래서 하나페페 마을에서 얼핏 봤던 파인애플을 짊어진 닭이 관광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하와이의 생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 함께한 점심시간에 닭들이 어떤 잡담을 했을지 상상해 본다.

“저 여자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냐, 얼른 먹기나 하지.”

“생선튀김에 레몬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밥이랑 고구마는 참 좋은데 생강은 진짜 싫어. 인간들은 어떻게 그런 걸 먹냐.”

“탄수화물 많이 먹었으니까 칼로리 좀 태우자. 칼랄라우 밸리까지 등산 어때?”

“칼랄라우는 어제 다녀왔잖아. 오늘은 와이메아 캐니언에 가서 날기 연습하자.”


닭들이 식사하고 물러난 자리는 고요했지만 그 만남의 울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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