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꽈배기만 먹자 심통이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자리에 누웠다. 나는 할머니의 두터운 등을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는 아마도 내가 빨리 방에서 나가길 바랄 거였다. 달콤한 냄새와 꽈배기 씹는 소리 때문에 괴로울 테니까. 나는 일부러 입술에 들러붙은 설탕까지 혀로 핥아가며 천천히 다 삼키고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꽈배기를 양껏 먹어 기분도 느긋했다. 나의 기척에 몸을 일으킨 할머니는 또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런 거 자꾸 먹으면 못쓴다, 건강에도 안 좋고 살만 찐다, 공원에라도 나가서 걸어라. 나는 대꾸 없이 할머니 방 문고리를 번들거리는 손으로 잡았다. 등 뒤로 할머니의 노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문고리에 기름기 발라놓고 가는 거 봐, 착하던 얘가 왜 저리 변했을꼬.” 나는 할머니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할머니 방을 나오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도 예전에는 숨이 끝까지 차오르도록 공원을 뛰곤 했다. 힘껏 내달린 뒤 공원 전경을 바라보며 다 잘될 거라는 기합도 호기롭게 내질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밖에 나가 달리고 싶지 않았다. 달려도 달려도 끝은 없는 것 같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묘연한 기분마저 들었다. 번들거리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꽈배기를 집어 드는 순간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꼭 꽈배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최근 들어 군살이 많이 늘었으며 변비도 심해졌다.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하나만 먹고 멈추면 짜증이 나고 허전했다. 세 개까지 먹어야 만족스러웠다. 제일 중요한 건 지금이고, 내일은 그다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일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사는 재미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꽈배기를 선택하는 내 행동은 일종의 손실 회피이기도 했다. 손실 회피란 얻은 것의 가치보다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꽈배기를 먹지 않아 얻게 되는 건강과 몸매보다 꽈배기를 못 먹는 쓸쓸함을 크게 여긴다는 나를 보고 어리석다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요요현상까지 계산에 넣으면 내 판단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였다. 즉, 기껏 체중을 감량했다가 다시 찌면 맛있는 음식을 참았던 스트레스는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괜히 전문용어를 써가며 허접한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나는 엉터리 경제학 전공자였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때려치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껏 납부한 등록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며 쓸데없는 생각 말고 졸업까지 하라는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물론 용기가 있었다면 들인 돈과 시간을 무시하고 딴 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나 역시 그만두고 나서 뭘 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되는 법이지, 게다가 비교적 취업 잘 되는 전공이라잖아, 하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가끔 생각했다. 왜 하필 원서를 쓸 때 경제학과가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아무리 대강 선택한 전공이라지만 내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다른 과도 많았으니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수업 시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듣는 순간 시장 가격 흐름이고 뭐고 교수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온 그 조언은 내 무의식에 은밀하고 깊게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쓸모 있는 짓만 한다면 모름지기 경제적인 인간이지, 하며 나를 경제학과로 이끈 거였다. 영화나 소설 속 능동적인 주인공이라면 그런 생각에 미치는 순간 복잡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강의실을 뛰쳐나가야 마땅했겠지만 나는 멍하니 앉아 이런 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가, 뭐 그런 상념에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거창하게 운명까지 운운하지 않더라도 흐름대로 사는 게 낫다는 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느꼈었다. 언젠가 카페에서 일할 때였다. 거기에서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그 메뉴는 안 되세요, 만 원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했다. 우스꽝스러웠지만 처음엔 그냥 따랐다. 그러나 일이 익숙해지면서 제대로 된 한국말로 하고 싶어졌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그 메뉴는 안 됩니다, 만원입니다.’ 이렇게 말해 보았다. 별일 없이 며칠이 지나가기에 역시 매뉴얼을 고치는 게 옳다고 생각할 즈음 일이 터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우리 카페 리뷰에 ‘요즘 카페 알바들 대부분 친절하던데 거기 알바는 말투가 뻣뻣하고 예의 없었음.’이라 쓰고 별 다섯 개 중에 하나만 체크한 거였다.
사장은 어쩌다 그런 리뷰가 나온 거냐고 나와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세워놓고 물었다. 나는 혹시 나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쭈뼛거리며 아무래도 내가 매뉴얼과 다르게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사장은 나에게 어떻게 응대했는지 정확하게 말하라 다그쳤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뒤 자기 멋대로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필요 없다며 대번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 바지런하게 일을 잘한다고 나를 칭찬했던 사장이었다. 그랬기에 그 일 하나로 나를 해고한다는 게 믿기 어려웠지만, 사장은 내가 그날 퇴근하기도 전에 ‘가족처럼 함께 일할 분 구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문에 붙였다. 그걸 본 나는 코웃음을 치고 카페를 나와 버렸다.
그날 밤, 친구들을 불러내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하소연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이런 타박을 했다. 틀렸다는 걸 누가 모르냐, 다 알아도 그렇게 하라니까 하는 거다,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의 자손도 아니면서, 더군다나 아르바이트생 주제에 뭐 하러 그런 짓을 했느냐. 어이가 없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 사건으로 손님과 사장은 불만이 생겼고, 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으니까. 역시 별 탈 없이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닥치고 대세 따르기’였다. 내 마음대로 했다가 잘못되면 오롯이 내 탓이었지만, 매뉴얼이나 어른들의 조언대로 했을 때는 뜻하지 않은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핑계 댈 대상은 있는 셈이었다. 일종의 면죄부를 손에 쥐고 있는 거라고나 할까.
그래서 소신껏, 반항하거나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으며 필요하다는 자격증을 취득했고 일터에서는 따르라는 지침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누구든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쉽게 외면당하고 대체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이러느니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다는 반발심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안타깝게도 나는 일 인분 밥벌이도 못 하는 처지라서 혁명적인 반항을 꿈꾸지는 못했다. 어른들의 말에 대꾸를 제대로 안 하거나 괜히 작은 심술을 부리는 정도의 사소한 반항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할머니는 걸핏하면 내가 변했다며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