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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08. 2024

소설_엉덩이의 변수 3화

  답답한 마음에 침대에나 누우려는데 스케줄 알람이 울렸다. 그랜드웨딩홀. 아뿔싸, 오늘은 하객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마침 집에서 걸어가도 될 만큼 가까운 웨딩홀이었고, 오랜만에 기분 전환 겸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가 집밥이 아닌 호텔식 뷔페를 맛보고 올까 해서 신청했었다. 할 일도 간단했다. 신부의 친구인 척 신부대기실로 가서 화장 너무 잘 됐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 거야, 잘 살아라, 이런 살가운 말들을 하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함께 찍은 뒤 식사하고 나오면 끝이었다. 하객 수를 인간관계 내지는 인성의 척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하객 역할을 하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만만찮게 우스웠다. 그래서 잠깐의 연극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서둘러 씻고 옷장을 열었다. 몇 개월째 계절과 무관하게 집에서는 파자마, 집 근처를 나갈 때는 추리닝을 입으며 지냈다. 그러나 오늘은 구월에 어울리는 가을옷을 입어야 할 거였다. 그것도 업체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원피스로. 회사 다닐 때 입던 살구색 원피스가 보였다. 거기에 브라운 빛깔의 볼레로 재킷을 입으면 될 것 같았다. 지퍼를 끝까지 내린 원피스 사이로 다리를 넣고 위로 끌어올렸다. 엉덩이에서 턱 걸렸다.


  잠시 당황했지만 보정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일부 기업체에 분식회계가 있듯 남들에게 보이는 몸매에도 크고 작은 꼼수가 있는 법이었다. 즉, 실체적 진실보다 가슴은 커야 하고, 허리는 날씬해야 하며, 엉덩이는 올라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서랍에서 압박 스타킹과 올인원 코르셋을 꺼내 들었다. 숨을 참으며 간신히 올리고 조였다. 조심스럽게 원피스를 다시 입어보았다. 엉덩이와 배를 무사히 통과해 어깨에 옷을 걸칠 수 있었다. 뒷지퍼를 올리려고 팔을 뒤로 넘기는데 살짝 봉제선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혼자 입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나를 샐쭉한 눈으로 봤지만 이내 어쩐 일로 그런 옷을 입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하객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라 했다. 이어 등을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나는 지퍼가 조금이라도 잘 올라가게 하려고 움츠렸던 몸을 쭉 폈다. 할머니는 이런 걸 입고 나갔다가 숨 막혀 죽으면 어쩔 거냐고 군소리하면서도 지퍼를 올려주었다. 돌아서며 우리 할머니 짱! 하고 말하는 내게 이렇게 입으니까 우리 손녀도 예쁘네, 하며 웃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마른 게 예쁜 건 아니라고 했다. 할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코르셋에 살을 욱여넣은 내 몸은 아무리 후하게 평한대도 ‘보통보다 조금 통통’이라는 것을. 


  내 방으로 돌아와 옷장에서 볼레로를 꺼냈다. 팔 부분이 너무 가늘었다. 도대체 옷들이 왜 이리 줄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은 케이프 숄을 찾아 걸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옷을 입느라 지친 나의 볼이 발그스름했다. 하필 숄의 색도 비슷했다. 살구색 원피스에 분홍 숄. 설핏 분홍 돼지가 연상되어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못 나간다고 둘러대고 싶었다. 그렇지만 넉넉잡아 세 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게다가 이런 이유로 안 나가면 살찌는 음식만 골라 먹으며 집에서 뒹구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할머니가 또 잔소리할 게 분명했다. 지퍼는 왜 올려달라 했느냐고도 하겠지. 그런 말을 듣느니 나가는 게 나았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느라 몸을 숙이자 대번 답답해졌다. 발마저 부었는지 구두도 작게 느껴졌다. 진짜 나가도 될지 다시금 망설여졌다. 그때 할머니가 현관으로 나와서 결혼식장이면 신랑 친구들도 많겠네, 했다. 뒤이어 나올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대답 없이 얼른 현관을 나서려는데 할머니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또 들렸다. “그래, 남의 결혼이라도 봐야 결혼 생각이 더 나겠지.” 나는 할머니를 흘겨보고는 일부러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할머니의 성질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하던 얘가 왜 저리 변했어. 지퍼 올려주면 뭐 해. 에잇, 못된 년!


  예식장에 도착해 하객 업체의 담당자부터 찾았다. 그는 먼저 도착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안내 사항을 일러주며 식권을 건네고 있었다. 그다음 나를 훑어보고는 보내주신 사진과 다르시네요, 하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 줄 알 것 같았다. 나는 하객이 신부보다 예쁘면 되겠느냐고 농담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신부의 얼굴도 모르는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한숨을 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갑자기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하객을 의뢰한 신부가 조금 까다로워서요,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 숨을 크게 내쉰 것뿐인데 그는 내가 화난 거라 여긴 모양이었다.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아무 말 없이 신부 대기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객 아르바이트를 할 사람은 나 말고도 많다. 하객 업체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면 내 이름은 조만간 거기에 올라갈 것이다.


  신부 옆에는 조금 전 하객 업체 담당자와 있었던 세련된 차림의 여자 서너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가며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나도 작년까지는 그렇게 하객 역할을 소화했었지만 오늘은 자신이 없었다. 혹여나 옷이 찢어질까 봐 반듯한 자세로 신부 앞에 가서 뻣뻣하게 눈인사만 건넸다. 화사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신부는 긴장한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신부의 상사이거나 선배쯤으로 여기겠지, 했는데 신부까지 자기가 기억 못 하는 윗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지만 겸연쩍기도 했다. 


  신부를 위해서라도 얼른 비켜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기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지며 주변을 둘러봤다. 예식이 끝날 때까지는 머물러야 했다. 마침 화장실이 보여 거기로 들어갔다. 원피스 앞섶의 단추를 풀고 숨을 돌리고 있자니 어느새 식을 시작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조금만 참자고 되뇌며 옷을 여미고 꼿꼿하게 나갔다. 사람들은 예식홀 구석의 벽에 기대어 선 나에게 앉으라며 빈자리를 가리켰지만, 간신히 미소만 지으며 사양했다. 


  음악에 맞춰 입장하는 신부를 보면서 저 여자는 결혼을 하는 걸까, 결혼이라도 하는 걸까 궁금했다. 주례사를 듣고 그녀가 작은 기업체에 다니고 있는 걸 알았다. 그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처지인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어디든 다니고 있을 때 결혼한다면 저 신부처럼 소개될 테니까. 어디든, 마저 없는 지금 같은 처지라면 신부 수업 같은 소리를 듣겠지. 상상만 해도 싫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도 하라고?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내 신경은 이제 몸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구두에 끼워진 발끝의 통증으로 집중되었다. 계속 서 있으려니 진땀이 흐르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단체 사진을 찍기 전 잠시라도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어정쩡한 자세로 걸터앉아 구두를 벗었다. 허리를 굽혀 발을 주무를 엄두도 나지 않아 발가락만 간신히 꼼지락거렸다. 내 발가락마저 어루만져 주지 못하는 신세가 애처로웠다. 다음부터는 이런 옷과 구두 따위 쳐다보지도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고개를 들자 화장실 문에 붙은 작은 거울이 보였다. 보정 속옷을 입고 숨이 막혀 얼굴이 하얗게 된 내 모습 위에 뷔페 음식 먹을 생각으로 싱글거리며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던 내 모습이 겹쳤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린 채 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마주친 거울 속 나는 조금 전보다 더 피가 안 통하는 듯한 낯빛이었다. 뷔페는커녕 물도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방을 열어 아까 담당자에게서 받은 식권을 꺼내 노려보다가 잘게 찢어 휴지통에 던졌다. 그나마도 절반은 바닥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며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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