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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12. 2024

소설_엉덩이의 변수 4화

  예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옷부터 벗었다. 옆구리 바느질선 일부가 와라락 뜯어졌지만 어차피 앞으로는 안 입을 옷이니 신경 쓰지 않았다. 보정 속옷까지 벗자 옥죄어 있던 나의 살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편안하게 펼쳐졌다. 애벌레가 허물 벗을 때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뒤졌다. 할머니는 예식장에서 먹고 올 줄 알고 내 점심을 준비하지 않았다며 왜 그냥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밥이 가득한 숟가락을 부지런히 입으로 날랐다. 할머니는 곁눈질로 나를 살피더니 물 한 잔을 내 옆에 놔 주고는 아무 말 없이 주방을 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숨이 제대로 쉬어지고 드디어 살 것 같았다. 배도 부르고 이래저래 지친 나는 씻기도 귀찮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잠깐 유튜브를 몇 개 보다가 편안히 낮잠이나 잘 심산이었다. 유튜브에 접속하자 내가 구독하고 있는 채널의 유튜버가 새로 올린 영상이 있다는 알림이 보였다. 제목은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 2’. 무슨 채널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무심코 클릭했다.


  화장기없이 초췌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화면에 떴다. 저런 여자가 엉덩이에 진심이라고? 어쩐지 낯선 부조화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입이 크게 벌어졌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 그녀에게서 경제 수학을 배웠다! 당시 그녀가 수학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기에 구독을 눌렀었는데, 한동안 올리는 영상이 없어서 아예 잊고 있었다. 느닷없는 업데이트도 그렇지만 제목이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 채널의 주제가 수학에서 엉덩이로 바뀐 건지, 아니면 수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엉덩이를 엮은 건지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베개를 등에 대고 앉았다.


  영상 속 그녀는 운동량에 따른 엉덩이의 부피와 질량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예측하고자 했었다며 그저 재미 삼아 들어달라 당부했다. 그러고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끔 쉽게 설명할게요, 하면서 어이없게도 대학교에서나 배우는 구면좌표계를 운운했다. 아크릴판에 인테그랄 기호도 써가며 사뭇 진지했다. 설명을 위해 보여준 함수식은 구의 표면적과 부피 공식을 기본으로 만들었기에 양쪽 엉덩이가 완벽하게 볼록한 반구 형태여야 가능했다. 그러니까 오뚝하게 선 엉덩이. 아무튼 그녀는 근육과 지방의 부피 당 그램 수도 보여주며, 밀도 있는 엉덩이를 위해서는 반구 안쪽을 지방이 아닌 근육으로 채워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근육이 잡아주지 못하는 살은 아래로 처질 수밖에 없다고.


  내가 어처구니없는 가정과 설명에 입술을 씰룩이려는 순간,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신체는 무척 복잡하거니와 변화에 영향을 미칠만한 요소가 너무 많아서 엉덩이의 미래를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건 포기했다고 했다. 그녀의 민망해하는 표정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영상은 수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유도하는 효과도 조금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자신의 엉뚱함을 고백하기 위한 것 같다고. 굳이 왜?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영상이 있는지 살폈다.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 2’라는 제목으로 보아 그전에 올린 게 있을 터였다.


  역시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것도 열어봤다. 그녀는 화면이 살짝 흔들리는 허술한 영상 속에서 자신을 이번 학기에는 강의도 배정받지 못한 강사라 소개했다. 이어 여태껏 자기만 생각하며 못되게 살아왔노라 고백했다. 이제라도 누군가와 좋은 추억을 나누길 원하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서글픈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내 기억 속 그녀는 강의할 때 항상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말했다. 썩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넘쳐 빛이 났었다. 그랬는데 지금 내 앞의 그녀는 한 말을 또 하기도 하고 혀도 약간 꼬이는 것 같았다. 눈물도 흘렸는지 코와 눈가가 붉었다. 예전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그녀 모습에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경제 수학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나오는 날이었다.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워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어떤 학생은 학점을 어떻게 주려는 거냐고 투덜거렸고,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기말고사까지 이런 식으면 학부장에게 말해서 저 강사를 잘라야 한다는 격한 말도 오갔다. 학점을 더 올리려고 재수강한 선배들은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틀린 답안에도 부분 점수라는 걸 줬다. 그것도 꽤 후하게. 그녀는 예상 밖의 점수에 고개를 갸웃하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수학 공식에는 굉장히 오랜 기간 오답 속에서 헤맨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나름 논리적으로 풀어보려 애쓴 풀이에는 부분 점수를 줬어요. 틀리더라도 직접 부딪혀 봐야 아, 내가 이런 부분을 모르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거든요. 답을 찾으려는 시도나 노력을 아예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는 걸 기억하세요.”


  대개의 수강생은 문제를 터무니없게 낸 주제에 멋있는 척을 한다며 비아냥댔다. 나는 아니었다. 뜻밖의 높은 점수를 받아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좋아졌다. 노력을 강조하는 경구는 지겨울 정도로 흔했으며, 그 당시의 나는 꽤 열심히 살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크게 마음에 와닿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수학이라는 학문에 깃든 오답의 역사와 노력을 연결하는 것은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어쩐지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그녀와, 별생각 없이 사는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아 주눅이 들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실토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다소 실망했지만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가 실제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였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가만히 눈만 끔뻑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녀가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 2’에서 자신의 가설을 설명하느라 보드마카로 아크릴판에 쓱쓱 그어댄, 그러니까 반구 모양 근육이 엉덩이에 차곡차곡 쌓여 볼록해지는 그림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엉성하지만 묘하게 끌리는 면이 있었다. 당장 내 엉덩이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신거울 앞에 섰다. 파자마 바지와 팬티를 한데 잡아 내리고 고개를 돌려 엉덩이를 살폈다.


  첫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특징은 펑퍼짐하다는 것. 심지어 넘치는 엉덩이 살을 아래로 밀어낸 양 엉덩이 밑에 주름까지 보였다. 보정속옷 안에 쭈그리고 있었을 때의 엉덩이는 어땠을지 가늠해 보았다. 엉덩이에 표정이 있다면, 아까는 스타킹을 뒤집어쓴 얼굴처럼 마구 짓눌려 그야말로 처참했을 거였다. 지금은 한없이 우울하게 입꼬리가 처진 듯한 모습이었다. 살이야 조금 찔 수 있지만 삼십 대 초반의 엉덩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우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머리를 내저었다. 내 엉덩이를 품평하려던 게 아니라 그녀의 가설에 맞춰 내 엉덩이 상태를 관찰하려던 참이었다는 걸 되새겼다.


  내렸던 옷을 올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일단 나의 엉덩이는 부피는 컸지만 축 늘어져 있었다. 엉덩이 아래 허벅지까지 침범하고 있는 모양새. 그녀의 설에 대입한다면 내 엉덩이에는 촘촘한 근육보다는 느슨한 지방이 많은, 즉 밀도가 낮다는 의미였다. 살짝 과장하자면 거대한 지방 덩어리 두 쪽. 설핏 단위 부피당 무거우면 더욱 잘 처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안 하던 운동까지 해서 근육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얼마나 억울할까. 역시 살던 대로 사는 게 답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나는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엉덩이만 별도로 가져다 붙인 것도 아니고 온몸의 근육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움직이기 싫으면 그다지도 얄팍한 생각이 튀어나올 수 있는지, 참으로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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