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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12. 2024

소설_엉덩이의 변수 5화_완결

  가벼운 헛기침을 한 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만약 임의로 이상적인 엉덩이를 만들 수만 있다면 안쪽에는 치밀한 근육을 꽉 채우고 바깥에는 가벼운 지방을 살짝 섞을 거였다. 나는 바깥으로 지방을 밀어내면서 안쪽에는 근육을 빼곡하게 채우는 모습을 상상했다.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토록 쓸데없고 바보스러운 가설에 몰입해 본 적은 없었다. 아무튼 공상을 시작한 김에 탄탄한 엉덩이가 내 몸에 붙어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온몸에 자신감이 흘렀고 표정은 여유로웠다. 보정속옷의 도움을 받은 몇 시간짜리 엉덩이로 쩔쩔매는 구차함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어디에선가 유인원 중에 우리 인간에게만 특별히 커다란 엉덩뼈가 있으며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엉덩이 근육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사람이 가진 뼈의 개수와 마찬가지로 근육의 수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직립보행’하고 한 글자씩 천천히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답답하게 막혀있는 아파트 건물 뒤편으로 공원과 산등성이 일부가 보였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서 그런지 내 방에서 보는 풍경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인간의 엉덩이가 볼록하고 크게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은 ‘인간이란 똑바로 서서 힘차게 걸어야 하는 동물’이라는 뜻일 것 같았다. 엉덩뼈의 크기와 근육의 개수라는 상수 앞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변수는 오로지 근육량이었다. 나는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지금의 처지에서 넘치는 지방을 태워 근육이 튼실한 엉덩이를 만들어보면 어떨지 생각했다. 그 변수를 위해서는 운동이라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지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운동하다 멈추면 안 하느니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괜히 엉성한 동영상에 내 마음이 흔들린 듯했다. 다시금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라는 제목의 영상을 열어보았다. 나를 비롯해 경제 수학을 듣던 수강생들은 그녀가 전임이 되려고 애쓴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시간강사라 소개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아직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했던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는 헛헛한 마음은 나도 잘 알기에 절로 입꼬리가 처졌다. 그녀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동영상 속 그녀는 예전보다 늙고 다소 흐트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었다. 그걸 보니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경제 수학 성적을 공개하던 날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던 그녀의 또랑또랑한 말투도 다시금 귓가에 울리는 듯 느껴졌다.


  영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잠시 울먹였다. 그렇지만 절망하고 쓰러지는 대신 엉덩이를 살아가는데 의지할 만한 것, 어떤 완충재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예쁜 엉덩이 모양이 교집합의 벤다이어그램과 닮았다는 것에 착안해 앞으로 사람들과 좋은 교집합을 만들며 살겠다는 다짐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엉덩이에 진심인 여자가 된 거였다. 솔직히 나는 그녀의 교집합 설이 재미있긴 했지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비교적 좋은 교집합을 이미 갖고 있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잔소리가 많아 그렇지 나를 사랑해 주는 할머니였다. 그래도 그녀의 엉덩이 만들기에는 동참하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엉덩이는 무엇일지 잠시 고민했다.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내 몸 근육의 대표주자이자 나를 당당하게 세워줄 엉덩이였다. 어딘가 꼬여버린 내 삶을 바로잡아 줄 중심.


  나는 우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녀가 수학적 시각으로 영상을 제작했으니까 나는 경제학 이론을 바탕으로 답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댓글에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운운하며 사람에겐 이기심이 있지만, 그걸 조절해 삶을 올바르게 이끄는 거라는 내용을 썼다. 이타적 결과 안에도 이기적 동기가 있기 마련이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용기를 갖고 나아가면 된다고. 그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강 끼워 맞춰보려는 내가 같잖게 느껴졌다. 몽땅 지우고 간결하게 요점만 적었다. ‘교수님 엉덩이 짱!’ 마음에 들었다. 그게 나답기도 했거니와 그녀는 교수님 소리를 듣는 게 소원일 테니까 딱 적당했다.


  유튜브를 닫은 나는 입을 다물고 주먹도 꽉 쥐어보았다. 다시금 창밖을 쳐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 ‘분연히’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휘를 떠올리자 몸에 더욱 힘이 솟았다. 몸통을 좌우로 최대한 비틀었다. 이어 팔과 다리도 꼬아서 쭉 뻗어보았다. 그다음 온몸을 툭툭 털었다. 순간 내 몸이 꽈배기가 되어 몸에 붙은 설탕을 털어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 몸이 기름에 튀겨진 꽈배기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살이 겹친 부분이 많다는 점도 그렇고 통통하고 말랑거린다는 점도 그랬다. 설마 꽈배기를 너무 많이 먹어 기어이 닮게 된 것은 아니겠지. 먹는 음식 모양대로만 된다면야 늘씬한 호리병박을 먹는 것도 감수하겠지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는 팔과 다리를 털고 있는데 할머니가 내 방문을 살짝 열면서 꽈배기 사 왔는데 먹겠느냐고 물었다. 아까 거절하고는 내내 생각이 나서 결국 밖에 나가 사 온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설마 운동하러 나가려는 거냐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머니 손에 든 꽈배기 봉지를 보며 아버지의 애창곡인 김광석 노래를 흥얼거렸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할머니는 나를 빤히 보다가 마음 바뀌면 말하라며 방을 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문을 열고 기대에 찬 듯 한마디를 더 했다. 결혼이라도 하기로 한 거냐?


  ‘이라도’라는 말에 이번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내 엉덩이를 양손으로 쓸어 올리며 답했다. “섹시한 엉덩이라도 만들어보려고요.” 할머니를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도 던졌다. 할머니는 나를 흘겨보다가 별 이상한 말을 다 한다고 구시렁대며 방을 나갔다. 나는 혼자 피식 웃으며 잡고 있던 엉덩이를 툭 내려놓았다. 이렇게까지 맥없이 떨어지는 엉덩이는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물론 오전까지 해왔던 대로 언젠가는 꽈배기에 다시 손을 뻗을지도 몰랐다. 울적한 날에 왠지 옛 애인이 더 떠오르고, 술에 취해 전화도 걸고 그러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시간을 겪더라도 언젠가는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는 것과 같이 나도 그럴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엉덩이가 차오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전신거울 속 나를 주시했다. 나가기 전 예전에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을 때 지도받았던 스쾃을 해보기로 했다. 좌우 발을 골반보다 살짝 넓게 벌리고 반듯하게 섰다. 등을 곧게 펴고 천천히 무릎을 구부렸다. 발에 체중이 점점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허벅지를 무릎과 수평이 될 때까지 내리자 다리가 놀란 듯 후들거렸다. 열 번을 반복하고 다시 거울 속 나를 쳐다봤다.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나는 엉덩이의 변수! 하고 기합을 넣으며 방문을 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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