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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Apr 20. 2023

오늘을 살아가세요

88세 어르신께 배운 원포인트 레슨

창덕궁 나들이에 나선 날, 지하철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났다.


부모님을 모시고 안국역까지 가는 길, 신분당선 지하철 내부는 만원이었다. 출근시간도 아닌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지하철 이용객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70대 중후반 부모님이 걱정되어 두리번 거리던 중, 빈자리가 하나 보여서 얼른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바로 옆옆 자리가 하나더 났는데 마침 옆자리 여자 어르신 한분이 센스있게 한자리 옆으로 이동해 주셔서 엄마가 앉으시게 도와드렸다.나는 의례히 "고맙습니다" 인사를 드렸다. 엄마와 나란히 앉으신 그 어르신은 자연스레 엄마와 대화를 시작하셨다.


"내가 올해 88세야..." 간간히 들리는 말씀 중에 나이를 언급하셔서 내심 놀랐다. 연세에 비해 겉모습이 엄청 건강해 보이셨다. 외모도 외모이지만 말씀하시는 목소리나 표정, 행동 등 보통 80대 후반의 어르신이라고 하기엔 놀라워 보였다.(솔직히 우리 부모님 보다도 더 마인드가 젊어보였다)

두분은 10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셨다. 눈도 밝고 귀도 밝고 아픈 곳 없이 생활하신다는 어르신에게 엄마는 연신 감탄했고, 어르신은 건강하게 늙는 법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시는 듯 했다.


환승역에 도착해서 우연히 같은 방향의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우리 일행은 어르신과 자연스레 동행했다.

"여긴 딸인가보네? 딸은 평생 친구야~" 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에게 나 또한 간단하게 인사를 드리며

그 연세에 건강하게 다니시는 모습이 대단해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르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

순간 멈칫했다.


오늘만 살아. 어제 일 후회 말고 내일 일 걱정 말고
그저 아침에 눈뜨면 '감사합니다' 하고 오늘만 잘 사는 거야

오늘만 잘살자! 잘 산 오늘이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되는 거다. 아프고 나서 생긴 나의 좌우명이었다. 뜻밖의 불행을 만나고, 좌절한 감정이 바닥을 찍고 다시 올라왔다.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채우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짧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뜻밖의 불행의 위험이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도사린다.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보낼 수 있는 '오늘'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내가 허황된 욕심과 잡념을 버리고 오늘만 잘 살자고 결심한 동기다.


201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수상한 배우 김혜자가 수상소감으로 말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 명대사에서도

이와 같은 세계관을 볼 수 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또 얼마 전 tvN '유퀴즈온더블록'에서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이지선 교수가 소개한 '오늘 살이'라는 인생관도 비슷한 맥락이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세요

격하게 공감하는 나에게 88세 어르신은 몇가지 팁을 더 귀띰해 주셨다.


"시어머니 시집살이 이런거로 스트레스 받고 그러는데 다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내가 며느리랑 같이 사는데,우리 며느리는 가끔 화내고 그러는데 난 그렇구나 하고 웃어넘겨~"


나중에 엄마에게 전해들으니 32년을 고부가 함께 사셨다고.서로간에 힘든 점이 많을텐데 모르면서 의미없는 추리는 둘째 치고,그 어르신 인상이나 말씀하시는 모습을 봐서는 특별히 자식들에게 많이 의지하시진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마인드도 내공도 대단하시다.


"하루에 오전, 오후 나눠서 8천보씩 걸어" 와우! 요즘 하루 4km씩 걷기(약 6,000보)를 하고 있는 나도 다리가 조금 피곤한데 8천보라니! 정말 보통이 아닌 분이다.  


"나는 봉사도 많이 했어. 죽은 사람 염도 많이 했는데 하다 보니 죽은사람은 하나도 안무서워.산 사람이 무섭지…"

"ㅎㅎㅎ" 말씀하시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고 위트까지 있으시다.


"그리고 일기를 매일 써, 일기쓰면 시도 되고 너무 좋아~"

이 대목에서 또 한번 멈칫, 어쩜 나와 좌우명도, 취향도 비슷하시다.

“행복은 누가 대신 만들어주는게 아니야.자기가 만드는 거야"


참 옳으신 말씀이다 싶다. 88세 어르신이 알려주신 '건강하게 나이드는 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오늘 하루를 감사히 여기고 잘 산다는 마음, 운동과 글쓰기,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머리와 신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래살고 싶다는 바램은 없지만,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사는 법, 건강하게 나이드는 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창덕궁 후원 견학을 하면서,  철쭉과 모란꽃, 느티 나무부터 360년된 젊은 은행나무(다른 곳엔 1천년 넘은 은행나무도 있단다)를 둘러봤다.마침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 봄 볕이 제법 눈이 부시게 뜨거운 날이었다.

세월의 풍파에 깎이고 파이고 속이 훤히 비어있는 고목들도 많았다. 그런데 적잖이 불편해 보이고 죽어가는 듯한 나무에서도 새순이 돋아나는 걸 보니 신기했다. 몸은 부서져도 그 뿌리만은 건강하다는 것일까.

사람들이 자연에서 감동받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혹독한 추위와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살아가는 거다. 오늘의 계절에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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