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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안키친 Apr 20. 2022

나의 목소리가 널 부를 때

300원과 노래 두곡에 위로받은 날


가끔씩 오늘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 속에 조용히 찾아와줘


가수 장필순님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의 가사 중 한 부분이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스웨터 마냥 기분이 암울한 오늘같은 날에 딱 맞는 노래다.


평범한 목소리를 가졌던 내 기억에 남은 목소리에 대한 첫 에피소드는 지금의 직장에 처음 입사한 날이었다. 직속인 여자선배의 목소리는 소프라노에 말 그대로 꾀꼬리 같았다.

전화를 하나 받아도 아나운서 같은 명확한 발음으로 사무실 공기가 찰랑찰랑 하게 흔들리게 했다. 이제 막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다소 투박하고  딱딱한 말투를 구사했는데, 나와는 대조적인 선배의 목소리가 부러워 남몰래 연습하고 흉내냈던 기억이 난다.


상대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안 건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다.


결혼 후 시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면 자동으로 ‘솔-‘버튼이 눌러졌다. 어쩐지 반가운 마음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게 있던 것 같다. 그 밖에도 호감을 주고 싶은 상대에게 말할 때는 목소리 톤을 올려 밝은 이미지를 주고 싶었다.


그런 목소리가 점점 굵어지고 커지기 시작한 건 두 아들의 엄마가 되고 나서다. 한참 아이들이 어릴 때, 하루는 회사선배와 외근을 나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 대화를 하다가 선배에게 목소리가 너무 크다며 지적을 받은 일도 있다.


하루는 한창 두 아들과 육해공중전을 치르던 어느날 귀여운 여자조카가 놀러왔다. 아장아장 걷는 조카와 손을 잡고 둘이서만 집앞 놀이터를 나갔을 때, 나는 익숙한 듯 어색한 내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리고 착잡했다. 맞아, 나도 결혼 전엔 사근사근 조곤조곤한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


그 후로도 육아전쟁은 계속되고 있거늘, 나의 목소리 성능에 결함이 생겨버렸다. 목 안에 생긴 종양 제거 수술을 하던 중 한쪽 성대가 마비되어 후유증을 앓게 된 것이다. 작은 목소리로 큰 세상을 사는 법이 이제 내 인생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목소리가 변하고 난 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목소리 톤의 변화가 더 절실히 느껴진다. 집에서 아이들과 생활할 때는 곧잘 선생님 모드가 되기에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커지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목이 쉽게 지치기도 했다.


반면 회사에서 어른들과 하는 대화에서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게 가능하다. 자연스럽게 목에 힘이 덜 들어가고 배터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육아휴직을 쓰면서 살림과 육아를 할 때나 회사에서 업무를 할 때나 힘이 든건 마찬가지인데 쓰는 근육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신체적인 근육부터 정신적인 근육까지가 다른 부분이 많고 피로의 종류도 다른 것 같다.


목소리 또한 신경에 연결된 기능이다 보니 집에서나 직장에서 쓰는 근육이 미묘하게 달랐다. 이를테면 집에서 1,3,5,7번 근육을 주로 쓴다면 직장에서는 2,4,6,8번 근육을 쓴다는 느낌이랄까?


최근 이직을 계획하는 중이어서 몇군데 면접을 볼 일이 있었다. 목소리 핸디캡 때문에 걱정도 긴장도 두 배로 됐다.


오늘도 한 군데 면접이 잡혀서 3일전부터 목관리에 신경을 썼다. 따뜻한 물 많이 마시기, 차가운 음료 먹지 않기, 소리 지르거나 많이 말하지 않기 등이다.


여느때처럼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든 다음 말하기 연습을 해야했다. 방송에 나오는 여자 아나운서나 변호사 중 낮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의 어조나 톤 조절 등을 분석해서 적용해 보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쫄지말자. 떨어져도 경험이 약이 된다.면접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


후웃! 드디어 면접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때 보다도 목소리에 신경을 쓰며 면접관들의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 나갔다. 다행히 긴장했던  보다  편안한 분위기로 대화가 이어졌다. 대답의 내용만 놓고 보면 긍정적인 반응인  같았다. 조심스럽게 희망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찬물을 끼얹는 마지막 질문이 있기 까지는.


한 면접관이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원래 그렇냐며 질문을 했다.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겸연쩍게 “네…”라고 대답했다. 사연은 많지만 말할 자리는 아니었으므로.


‘기-승-전-목소리’가 된 것 같아 속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위로가 필요했지만 위로를 구할 곳이 없었다.


왜 나이가 들수록 나의 아픔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하는걸까?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가족들에게 더더욱 그렇다.


완벽한 하루를 꿈꿨지만, 고장난 몸뚱아리 때문에 또한번 좌절한 날이다. 좌절도 많이 하다보면 적응이 될지,얼마나 더 많은 좌절을 겪어야 아무렇지도 않을지.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참았던 아이스커피를 샀다. 뜨거운 물을 담아간 텀블러에 샀더니 300원 할인이 됐다. 그리고 노래를 들었다. 얼마전 알뜰한 폰으로 바꾸고 나니 데이터가 금세 떨어져 알뜰하게 두곡만 듣기로 했다. 300원 할인과 노래 두곡에서 씁쓸한 위로를 꾸역꾸역 챙겨 안았다.


그래도 예전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핸디캡이 가려질 만큼 강력한 나만의 필살기를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음의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보컬 트레이닝도 열심히 해봐야겠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도 살뜰한 위로를

받고싶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고, 나의 하루는 충만하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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