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파빌라, 서던 리지스, 부기스 스트리트, 아랍스트리트
숲 위의 다리, 물결무늬의 데크를 걷는 모습의 서던 리지스 풍경 사진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오래 걸어야 할 것 같다. 아이들과 서던 리지스에 가는 것이 가능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고민했다. 마음을 접었다가도 계속 그 풍경이 떠올라 결국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좋단다.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 오래 걸어야 하기에, 아이들에게 몇 번을 다짐받았다.
“10시간 넘게 걸어야 해. 힘들어도 중간에 내려올 곳이 없어서 계속 걸어야 해. 참을 수 있겠니?”
“응, 걷는 거 좋아. 절대 힘들어도 짜증 내지 않을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아침 일찍 가방에 과일, 주먹밥, 음료 등을 챙겨 나왔다. 아이들도 본인들에게 힘을 줄 간식을 챙기겠다면, 가방 하나에 뭔가를 챙겨 나왔다.
지도로 서던 리지스에 가는 길을 찾다가 근처 관광지 표시가 되어 있는 호파빌라라는 곳을 봤다. 호파빌라? 관광청 안내 책자에서 봤던 것 같아 다시 찾아보았다. 호파빌라는 ‘호문호’라는 사람이 만든 싱가포르 최대 야외 테마파크라고 한다. 호문호가 누군지 생소했지만, 어렸을 때 만병 통치약으로 집에 갖고 있던 “호랑이 연고”를 만든 사람이라니 호기심이 생긴다. 중국의 신화, 전설 등을 주제로 꾸며놓았다는 호파빌라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MRT를 타고 호파빌라 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입구가 보인다. 화려한 색깔로 꾸며져 있는 조형물들이 입구부터 가득하다. 커다란 입구와 많은 조형물 외, 표지판도 없고, 사람도 없다. 길을 따라 걷다가 실내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
실내에 뭐가 있을지 궁금함과 기대를 갖고 다가갔다. 입구에 창과 칼을 들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말과 황소 조형물이 서 있다. 안은 캄캄하여 뭐가 있는지 안 보인다. 입구부터 으스스하다.
아이들이 들어가기 싫어했지만 조금만 용기 내 보자고 설득해 들어갔다.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모습, 지옥의 모습이 조형물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조형물들이었지만, 너무나 끔찍하고,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 밖은 35도가 넘는 불볕더위 날씨인데, 소름이 돋았다. 더 이상 보기도, 사진을 찍기도 무서워 아이들과 도망치듯 얼른 나왔다.
야외에는 우리가 아는 손오공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조형물로 꾸며져 있었다. 흥미로운 전설을 읽으며 구름 위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넓은 호파빌라 곳곳의 조형물을 다 둘러보았다. 공사 중인 곳 외에는 우리 셋뿐이다.
분명 “중국 전설 등을 테마로 꾸며 놓은 공원”이라고 읽었지만,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테마파크”하면 놀이동산이 떠오르기에 우리 마음대로 간단한 놀이기구라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전혀 없었다. 넓은 부지에 이야기를 꾸며놓은 조형물들과 울창한 나무, 그리고 우리 셋뿐이라, 밝은 대낮이지만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혹시나 뭐 재미있는 것을 놓칠까 봐, 다 둘러본 후 다시 입구로 나와 서던 리지스로 향했다.
지도에서 서던 리지스 가는 버스를 검색했지만, 버스 정류장이 안 보인다. 괜히 잘 못 타면 엄한 곳으로 갈 것 같기도 해서 지도에 의지해 걸었다.
인도가 따로 없다. 차도 드문 드문 다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전혀 없다. 주유소 하나 보일 뿐, 가게도 없다. 개인 주택들과 도로뿐이다. 그늘 한 점 없는 해안가 도로를 걸었다. 우리의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인다. 분명 서던 리지스는 숲이었는데, 이 길을 걷다 보면 숲이 나올까 싶다. 그래도 작정하고 왔으니 두 아이와 함께 계속 걸었다. 지도를 보며 도로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이제 좀 나무가 보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도로 위를 부채질하며 지도에 의지해 계속 걸었다. 사람 한 명 없다. 차는 어쩌다 한 대 지나간다.
‘이 길이 맞나?’
의심되었지만, 돌아가는 길도 너무 까마득하다.
이정표도 없다.
‘서던 리지스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하나?’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가?’
부채 하나에 흐르는 땀을 달래 가며 즐겁게 따라와 주는 아이들을 보니, 내가 너무 무모한 도전을 한 것 같아 미안하다.
길이 구불구불하여 앞 길이 보이지 않는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가파른 오르막 길을 걷고 있으니, 더 불안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보자. 지도에는 분명 얼마 안 남았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우리 셋은 구글 지도와 서로를 의지하며 걸었다. 드디어 저 앞에 표지판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셋은 표지판을 향해 달렸다.
“우와, 켄트 리지 파크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정표 하나 발견했을 뿐이다. 얼마나 남았는지 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불안했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한 이정표이다.
"켄트 리지 파크" 이정표에 힘을 얻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걸었다.
"여기부터 서던 리지스 시작입니다"와 같은 친절한 안내판은 없었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높은 나무들과 잔디밭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기가 맞는 것 같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안내해 주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걸었다.
전망대에서 잠시 바다를 내려다봤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이 보인다. 가방 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빠르게 걷는 외국인 커플도 보인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든다. 길을 찾기 위해 막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푸른 나무를 보며, 깊이 숨을 쉬며 걸었다.
숲 중간중간에 갈림길이 나온다. 역시나 이정표가 없다. 우리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흙길이 아닌 나무로 깔아 놓은 캐노피 워크를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럼 다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우리 셋은 그저 주변을 살피며 계속 걸었다.
파이프가 나오자 아이들은 가까이 가 두드려 보며 소리를
내 보았다: 축구공 모양의 조형물이 나오자 아이들은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았다.
“꿈 Dream”이 보이자, 아이들은 그 위에 올라갔다. 보이는 대로 만지고 느끼며 걸었다. 그렇게 숲 길을 걷다 보니, 숲 한가운데 조금 큰 건물이 보인다.
드디어 서던 리지스 안내판이 보인다.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야 알겠다. 여기는 서던 리지스 전체 구간의 중간 정도 되는 호트 파크 지점이다. 호트 파크에는 차가 많다. 사람도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나올 법한 옷을 입고 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호트 파크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동이로 물을 쏟아붓듯 퍼붓는 비를 맞고 갈 수가 없어 잠시 더 머물기로 했다. 금세 그칠 줄 알았던 비가 1시간이 넘게 온다. 점점 하늘이 더 어두워진다. 더 머무르면 더 막막해질 것 같다. 아직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빗줄기가 조금 약해진 듯하여 그만 출발하기로 했다.
플로랄 워크를 지나자 책에서 본 알렉산드라 아치 다리가 보인다.
서던 리지스에 오기 전, 알렉산드라 아치 다리를 포함해 3개의 다리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 줬다. 아이들은 사진 속 알렉산드라 아치 다리를 실제로 보게 되자, 하나의 목표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기뻐한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아직 한 참 더 가야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가게 되면 알게 될 길을 굳이 설명해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알렉산드라 아치 다리는 사진에서 보고 기대했던 것보다 짧았다. 알렉산드라 아치 다리를 지나니, 포레스트 워크가 나온다. 다리 밑으로는 차가 다닌다. 도로를 지나자 숲이다. 포레스트 워크는 말 그대로, 나무 꼭대기 높이에 다리를 설치해 놓아 숲 위를 걷도록 만든 다리이다. 다리 바닥은 촘촘한 간격이지만 아래가 보이도록 틈이 있게 만들어 놓아 까마득한 땅이 보인다. 경사가 있어 한 사람씩 계단으로 올라가도록 설치된 구간에는 “원숭이가 가방을 가져갈 수 있다”라는 주의표시가 적혀 있었다. 계단까지 덮은 나뭇가지에 혹시라도 원숭이가 숨어 있을까 두려워, 후들거리는 다리로 숨죽여 가방을 꼭 쥐고 이동했다. 까마득한 땅으로 빨리 내려가고 싶었다.
‘어디가 끝이야?’
길게 쭉 뻗은 다리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서운 다리, 하지만 달리 돌아갈 길도 없다.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숨 꾹 참고, 가방 꼭 쥐고 빠르게 앞으로 계속 걸었다.
“우와!!”
갑자기 숲이 사라지고 앞이 탁 트인다. 바람을 넣어 만든 소파에 누워 하늘을 그대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풍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건가?’
그 소파가 너무 부러웠다. 우리는 그들처럼 눕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담아가려 큰 숨을 쉬며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한 참을 바라봤다.
시원한 바람과 넓은 하늘을 보니, 앞도 보이지 않아 두려움에 떨며 지나온 숲도 정겹게 느껴진다.
물결무늬의 곡선으로 웅장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헨더슨 웨이브 다리를 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차가 다니는 도로 위에 높이 설치되어 있는 다리지만 촘촘히 나무로 바닥을 가려놓고, 높은 파도처럼 벽을 만들어 놓아 굳이 옆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 이상 높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넓은 폭의 확 트인 다리 위에서 아이들은 파도를 오르려 시도해보며 신나게 뛰어다닌다.
헨더슨 웨이브 다리를 지나자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이 많다. 관광객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자 거대한 멀라이언 상이 보인다. 멀라이언 상에서 바라보는 하버프론트 광경을 보니, 숨이 차올라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네를 타며 바람을 좀 더 느껴봤다.
그리고 아이들은 “행복의 종 Bell of Happiness”을 울렸다. 지금부터는 내리막 길이다.
호파빌라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우리는 페이버 산 정상까지 왔다. 행복의 종을 울리고 성취감에 들떠 있던 아이들, 갑자기 허탈감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왜?”
“엄마, 여기 케이블카가 있어!”
“그러네.”
하버프론트에서 페이버 산 정상까지 몇 분이면 데려다주는 케이블카가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왔다면 더 빨리 더 편안하게 왔겠지만, 걸어올 때 본 것을 보지는 못했을 거야. 원숭이 때문에 두려워하며 걸었던 것, 쏟아지는 비를 구경한 것, 그리고 헨더슨 웨이브 다리, 오는 길이 재밌지 않았니?”
“내려가는 길도 걸어갈까?”
몇 시간을 걸어온 아이들,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케이블카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 다짐하듯 입 앙 다물고, 야무진 발걸음으로 걸어서 내려왔다. 우리가 걸어오면서 함께 보낸 시간들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페이버 정상에서 하버프론트 역까지 내려오는 길은 금방이다. 풀숲을 헤치고 나오니, 차들이 쌩쌩 달리고, 큰 빌딩들이 있는 하버프론트다. 갑자기 문명으로 나온 기분이다.
아침 일찍 나와 집에서 싸온 주먹밥과 과일만 먹은 아이들에게 보상으로 문명의 맛을 주고 싶었다. 비보시티에서 와플 하나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줬다. 몇 시간을 걷고 나서 사 먹은 맛이라 그런지, 너무나 행복해하며 먹는다.
서던 리지스 완주에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하버프론트 쪽으로 내려오는지도 몰랐기에 이후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다.
“우리 부기스 스트리트에 가자!”
어제 부기스 스트리트에서 중국 전통의상이랑 인형 가방을 봤지만, 소유욕을 억제하며 빈 손으로 집에 왔다. 그런데 어젯밤, 계속 눈에 밟혔다. 아이들이 잘 따라와 준 것을 이유삼아, 결국 다시 부기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1달러짜리지만 어제 만족도가 컸던 과일음료를 사 먹고, 팝 치킨도 사 먹으며 중국 전통 의상 보러 가는 길, 사람들 입에서 연기 나는 것을 봤다. 아이들은 신기한 광경을 일으키는 과자를 파는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30분 넘게 드라이아이스를 뻥튀기에 입히는 과정을 지켜봤다. 결국 과자 한 통을 사고 자리를 이동했다. 입에 과자를 하나 넣고 연기를 내며 굉장히 흐뭇해한다.
이제 엄마의 목적을 이룰 차례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으며, 어제 본 인형 가방을 찾아 빠르게 걷는 엄마를 아무 말 없이 잘 좇아온다.
어제, 비싸서 계속 망설였다. 생활비밖에 없는 데, 사야 하는 이유를 만들고, 죄책감을 좀 줄이고 싶은 마음으로, 두 개 살 테니 1달러라도 깎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1달러도 깎아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못 사고 돌아 나왔다. 그런데 마음은 더욱 커져 오늘 또 간 것이다.
인형 가방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갑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어제 두 개 살 테니 1달러라도 깎아 달라고 했던 사람인데요.”
“아, 기억나요.”
“결국, 오늘 다시 왔어요. 아이들 꼭 사주고 싶어서. 깎아주실 수 없어요?”
“2달러씩 4달러 깎아줄게요.”
“우와, 감사합니다.”
4달러, 여기 다시 찾아온 차비이다. 그래도 어제 못 깎은 것을 깎아줬다. 마음에 들어온 가방을 더 기분 좋게 사게 되어 뿌듯하다.
“더 걸을 수 있어?”
이미 어두워졌지만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에 힘이 난다. 아이들과 더 걸어서 아랍 스트리트까지 갔다.
마침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격주로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활기찬 거리 모습에 우리도 한참을 구경하며, 아랍 치마와 기념품 몇 가지를 샀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었다. 어제 사온 냉동피자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편안함, 만족감이 더 느껴졌다.
만 6살, 7살 두 아이는 자신의 가방을 메고 12시간 이상 걸어 자정이 넘는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길을 걸으며, 자연과 문명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모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더욱 알게 되는 것 같다.
싱가포르 안에는 다양한 민족이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 우리의 방식으로 사는 우리도 있다. 싱가포르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