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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치 인생과업, 반년 만에 해치우기

임신과 취직, 내 집 마련 퀘스트 완료

찌는 듯한 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공기가 선선하다. 아... 드디어 가을이 온 건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리고 바라던 가을인지 반가운 마음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저녁산책을 하러 나서는 길, 팔을 한껏 벌리고 시원한 숨을 들이마시다 쌀쌀해진 공기에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파고드는 추위에 잔뜩 움츠렸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소리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정체된 삶에서 변화를 맞이해 보겠노라 결심하고 글을 적었던 것이 4월이니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정신없이 몰아닥치는 삶의 소용돌이를 맞이하느라 글 한자 적지 못했던 지난 반년, 무얼 하며 보내었나 가만히 돌이켜본다.




그간 먹어왔던 우울증 약을 끊고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은 것이 5월이었다. 우리도 가정을 꾸려보겠노라 결심하면서 몇 년간 미뤄왔던 2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난임병원을 찾았다. '잘 안되면 어쩌지, 아프면 어쩌지' 겁을 한 바가지 집어먹고 찾아갔건만 새 가족은 그간의 고민과 망설임이 무색하리만큼 쉬이 찾아왔다.


배에 주사를 놓고, 호르몬제를 먹고, 하루가 멀다 하게 병원을 오가며 난자를 키우고, 채취하고, 다시 심기까지... 몸도 마음도 고단했지만 여러 번의 시도와 좌절을 경험하는 여느 난임부부들과는 달리 우리는 단번에 부모가 되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당황스러운 마음에 우리는 결과를 듣고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부모가 될지 말지, 과연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약해빠진 내 몸과 마음이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해 왔던 시간들은 거짓말처럼 잊혀졌다. 매주 자라나는 생명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미래에 대해 희망을 이야기하게 됐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결혼을 한 이래 처음이었다.


1단계 미션 -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쉽사리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부모가 되는 것조차 쉬운 것은 아니었다. 아기를 품고 키우면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변화들 내 삶을 뒤흔들었다. 온종일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듯 속이 울렁대었고, 안 먹으면 토하고 먹으면 체하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3달을 버텼다. 그것은 <입덧>이라는 두 글자차마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상태였다.


몸도 마음도 무서우리만큼 급격하게 변했다. 호르몬치료를 하며 기하급수적으로 몸이 불어났고 아기는 콩알만 한데 배는 수박만 해지는 억울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몸은 앉아있을 힘조차 없이 무기력한데 감정은 어찌나 널을 뛰어대는지, 마치 내 안에 미친 공룡이 살고 있는 듯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기복 속에 휘청거렸다.


암흑 속을 뒹구는 내 컨디션과는 별개로 많은 이들이 새 생명의 존재를 진심으로 기뻐해줬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축하와 선물, 돌봄과 챙김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단지 한 생명을 잉태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소중한 취급을 받아도 되는가 싶은, 정말 의아하고도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2단계 미션 - 직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임신을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비밀스레 말해준 적이 있다. '한 생명의 존재가 부부와 한 가족의 삶에 들어오면서 모든 기운과 환경이 다 바뀌기도 한'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불현듯 떠올리게 된 것은 모든 시간을 지나 보낸 뒤 지난날들을 회상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말이 진실이었건 아니건 우리 부부의 삶은 아기를 가진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결혼 이후 지난 5년, 정말 다사다난 혹은 공사다망이라는 말로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스펙터클 했던 지난 시간들과는 달리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 마음가짐까지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우선 난임휴직을 쓰고 1년 반째 쉬고 있던 나는 임신과 동시에 다시 직장에 복직했다.(기 보단 어거지로 끌려갔다) 3년 간의 고시공부 끝에 시험에 합격했던 남편 또한 1년째 발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는데, 내가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도 발령을 받아 첫 근무를 시작했다.(기 보단 엉거주춤 끌려갔다)


대부분의 이들이 결혼식 이후 짧은 신행을 다녀와서는 함께 직장생활을 하며 퇴근 후 저녁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아왔을 테지만, 우리는 결혼하고 5년 만에 처음으로 둘 다 동시에 직장에 다니게됐다.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다 하루 2-3시간의 시간만을 함께 하려니 그렇게 애틋하고 아쉬울 수가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다 만나는 저녁시간이 참 소중하다. 


3단계 미션 - 내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임신과 취직만큼이나 커다란 변화는 생활환경에서 일어났다. 지난 5년간 살아온 임대주택에서 나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부부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가져다준 <순살신혼절망타운> 사건 이후 남편은 1년 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부동산 어플을 뒤적일 만큼 심란해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https://brunch.co.kr/@duckyou-story/161 )


그러나 억 소리 나는 가격의 집이라는 물건은 아무 나 쉽사리 가질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집을 머나먼 미래에 갖게 될 꿈의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랬던 우리가 집을 사기로 결심한 것은 단순히 우리 만의 결정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 우주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5년 간 살아온 전셋집은 가난한 신혼부부였던 우리에게 보금자리이자 안식처가 되어줬던 고마운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이상하리만큼 많은 변화들이 갑작스레 일어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개미와 바퀴가 집안으로 들이닥치고, 나이스했던 이웃들이 위아래에서 담배를 피워댔으며, 결로로 인한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


설상가상 집 주위로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집집마다 철거딱지가 붙어 동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마치 온 세상이 나에게 '어서 에서 나가'라고 아우성치는 기분이랄까? 둘 만이었다면 어떻게든 버티고 살았겠지만 아기가 생기고 나니 더 나은 환경에서의 삶이 절실해졌다. 우리는 막연한 꿈으로 미뤄뒀던 새 집으로의 이사를 빠른 시일내에 현실화시켜야만 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줄 때

지난 1년 간 틈틈이 돌아다니며 알아보았던 동네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동네에 있는 부동산을 찾았다. 소장님은 정말 좋은 가격에 좋은 물건이 나왔다며 한 아파트를 보여주었다. 노부부가 오래도록 살았다는 그 집은 낡았지만 따뜻한 온기가 어려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학교 운동장과 탁 트인 하늘 전망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남편에게 이 집으로 이사를 오자고 했다.


남편은 갑작스런 변화와 제안을 짐짓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대로 두었다간 말라죽어버릴지 모르는 남편을 돕기 위해서라면, 아니 언제가 될지 모를 내 집 마련이라는 과제를 해치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결정하고 실행에 옮겨야 했다. 그날 우리는 처음 본 그 집에 가계약금을 지불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로부터 1달 반 동안 엄청난 과정을 거쳤다. 생애 첫 집을 계약하고, 대출을 알아보고, 집 전체를 갈아엎어 인테리어를 하고, 이사를 준비하여 완성하기까지. 모두가 대체 그게 한 달 만에 어떻게 가능한 거냐며 뜨악해하는 일들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이전 집에서는 온 세상이 그 집에서 나가라고 외쳤다면, 새 집에서는 온 우주가 이 집에 들어오라고 도와주는 것 같았다.




폭풍과도 같았던 6개월이 지나고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다. 알게 모르게 무리를 한 탓에 몸이 좋지 않지만 마음은 여느 때와 달리 평안하다. 한낮에 거실에 앉아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자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찾아온다. 창 밖으로 풍경을 구경하는 고양이들의 뒤통수를 볼 때마다 뿌듯하고 만족스럽다.


하늘이 내다보이는 창 밖 풍경, 아침부터 낮까지 해가 드는 거실, 이제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하지 언제쯤 갈 수 있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그 자체로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인생에 주어진 몇 년치의 과업을 끝마쳤으니 이제 잠시동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도 되지 않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아기가 찾아온 뒤로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간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좋은 변화들이 줄줄이 이어졌으니 아이 자기 스스로 엄청난 존재임을 증명해 냈다고 해야할까? 사람들은 우리 아가에게 그런 복덩이가 따로없다고 했다.


뱃속의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 또 한번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전에 나만의 과업들을 마무리 짓고 싶다. 올해가 가기 전 내 이름으로 된 두 번째 책을 만들어 이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목표다.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물해 줄 나의 별, 아가야.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만의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을게. 우리 곧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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