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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irut Mar 26. 2019

늦여름의 커피가 맛있는 이유

 커피가 지금 배에 실리고 있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맛볼 수 있을겁니다


“파나마에서 구입한 커피가 지금 배에 실리고 있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도착하니 맛있게 볶아서 보내드릴게요.” 


연초에 산지를 다녀온 로스터가 귀한 소식을 전해준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신선한 커피가 우리나라 항구에 도착하는 8월 말 즈음엔 맛있게 볶은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늦여름의 커피가 맛있는 이유가 있다. 여름의 끝, 시원한 카페에 앉아 마시는 얼음이 자글자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커피 덕후라고 하기에는 섭섭할 테니 좀 더 과학적인 설명을 찾아야 한다.      


커피도 농산물이다 보니 제철에 막 수확한 햇커피가 가장 맛있다. 특히나 커피가 가진 본연의 맛과 향을 강조하는 스페셜티 커피의 경우, 신선함은 좋은 커피를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커피 열매를 수확해 과육을 제거하고 말린 씨앗을 생두라 하는데, 이 생두는 로스팅이 되기 전까지 남아 있는 유기물질을 산화시키며 호흡을 한다. 


이 영양분이 유지되는 기간은 보통 1년이며, 이 기간이 지난 생두는 어떻게 로스팅을 해도 생동감이 부족해 자칫 건초를 우린 듯한 맛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갓 수확되어 보관 기간이 1년을 넘기지 않은 생두를 뉴 크롭(new crop)이라고 부르며 기준으로 삼는다. 한 해를 넘긴 것은 패스트 크롭(past crop), 여러 해를 묵혀둔 것은 올드 크롭(old crop)이라고 한다.     


 


산지에서 생두를 가져오는 우리나라의 그린빈 바이어들은 대체로 2~5월께 산지로 향해 작황을 살피고, 한 해 동안 판매할 커피를 결정한다.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와 케냐, 아시아 대륙의 인도, 그리고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등 중앙아메리카의 산지는 대부분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가 커피 수확 철이다. 


그래서 중남미를 중심으로 최고의 커피를 뽑는 옥션인 ‘컵 오브 액설런스(COE)’의 일정은 대부분 봄과 여름에 몰려 있다. 이들 커피 생두가 가공되어 현지 항구로 옮겨져 선적되는 시기는 빠르면 5월 정도. 그 커피들이 항해를 마치고 한국 항구에 도착하는 시기가 대략 6월 말이고,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해 우리가 이 커피를 만나는 시점이 여름의 끝과 얼추 맞물린다.      


여름 끝의 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로스터도 사람인지라 여름에는 유독 지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초여름에 찾아오는 장마와 높은 습도, 그 이후로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기온 때문이다. 생두를 보관하는 환경도 나빠질뿐더러, 작년 늦여름부터 들여온 생두들이 동나기 시작하는 ‘보릿고개’도 커피 맛이 무뎌지는 데 한몫한다. 


그렇게 힘겨운 여름이 지나면 그 끝에서부터 바람도 시원해진다. 싱그러운 커피가 도착하고 무더위도 누그러지면 커피는 꽃을 피운다. 조금만 더 기다려 가을이 찾아오면 새로 들여온 커피들이 여기저기서 맛과 향을 뽐내니, 그 맛은 가을 하늘처럼 완연하게 아름다워진다. 


테라스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셔도 부담스럽지 않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 유독 기억에 남는 커피가 많은 이유다.      


맛있는 커피는 어느 계절에도,
어느 순간에도 있다


이제 막 수확되어 배에 실린 커피들을 생각해보라. 제철에 맞춰 마시는 커피는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과연 여름의 끝에서 마시는 커피만 맛있었나 싶다. 


가을이 무르익었을 때의 커피는 어떤가. 바야흐로 로스터들이 새로 들여온 생두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 맛을 제법 뽑아내기 시작할 때다. 방금 내려 마시고 있는 커피가 딱 그 예시인데, 한 모금 머금으니 잘 익은 단감마냥 달콤하고 고소하다. 


계절이 더 지나 겨울이 되면 수북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가 제법 맛있을 것이다. 봄에 피어오르는 꽃향기에 취하면 어떤 커피를 마셔도 기분이 좋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의 커피는 뉴 크롭이고 패스트 크롭이고 얼음만 동동 띄우면 시원하게 꿀꺽꿀꺽 넘어간다.    

  

결국에는 커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관심을 가지면 뉴 크롭이 아니더라도 커피가 맛있는 수많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니 마음 놓고 푹 빠져보자. 맛있는 커피는 어느 계절에도, 어느 순간에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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