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지전', 그깟 고지가 머라고
6월 16일, 두 달 남짓 후로 비행기 표를 샀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돌아가서의 계획도,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급격히 몰리기 시작한 해외여행 수요로 인해 계속 미루다가는 여름 내 돌아가게 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못 살겠다고 애들 두고 도망쳐 나온 엄마가 한두 달 더 있는다고 무슨 큰 차이가 있겠냐 싶지만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 끔찍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얻은 일말의 양심이 이제야 고개를 쳐드는 것일까,
방학이 길어질수록 남겨둔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날짜를 정하고 보니
지난 1월 아이들의 새 학기에 맞춰 도살장에 끌려가듯 돌아가야 했던 두렵고 막막했던 날의 심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지난해 10월, 묵히고 눌러왔던 부부의 문제가 변호사가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더럽고 흉측한 싸움으로 급진전된 이후로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이후의 시간은 마치 혼란스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시간을 뒤섞어 놓은 영화처럼 뒤죽박죽 흘러왔고 지금이 도입부인지 결말인지 클라이맥스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데자뷔처럼 또다시 상황에 떠밀려 티켓팅을 하는 순간을 맞았다.
다시 시간을 돌려 비행기 안.
부산스레 식사를 마친 아이들을 재우고 짐과 서류를 정리하고 불이 꺼진 시간, 그제야 조용히 리모컨을 돌려본다.
영화 ‘고지전(2011)’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55937)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을 땐, 메인 포스터에 군인이 있는 영화를 고르는 편이다. (https://brunch.co.kr/@sandew/42)에서 언급했듯 무언가 이 싸움의 명분 혹은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이 영화는 6.25 당시 1953년 2월, 휴전 협상이 지리하게 이어지던 때, 유리한 고지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뺏고 뺏기며 막판까지 싸워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전쟁 초반, 속절없이 밀리던 한국군. 의정부에서 만난 북한 군 장교 현정윤(류승룡 분)은 강은표(신하균 분)에게 말했다.
니들이 왜 싸움에서 지는 줄 아나? 왜 싸우는질 모르기 때문이야
몸보다 영혼이 먼저 죽어가는 전쟁터에서 참혹한 3년의 시간을 보내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모습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둘은 다시 만났다.
강은표는 물었다.
도대체 싸우는 이유가 모냐고.
3년 전 투지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현정윤은 아무 감정도 소회도 없는 빈 눈으로 대답했다.
내레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피식)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이에 강은표가 허탈함인지 분노 일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개. 새. 끼.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가.
6개월 전 이 싸움을 시작할 때, 나에겐 분명 이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한 억울함과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부르르 떨었고 지옥까지 따라가 싸울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 싸움의 끝이 둘 중 누구 하나가 죽어 나가야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를 증오하고 저주했고 그 악마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버텼다.
집안엔 1분 1초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흘렀고 실제로 마지막 고지를 지키려는 그들처럼 티끌만 한 계기가 있어도 우리는 개같이 물어뜯으며 싸웠다.
이 모든 상황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은 상처받았다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곱게 느껴질 정도로 찢기고 헤쳐졌고 우리의 악한 감정은 서로를 향한 또 다른 악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이고 쉬어야 할 집 안엔 증오가 가득했고 나도 아이들도 그도 모두가 지쳤다.
그 장면이 가슴에 칼을 꽂는 것 같았다.
우린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너무나 황폐해져 가는 마음과 영혼을 보듬기도 버거워 그냥 다 버리고 싶은 시간을 맞이한 지금,
난 이제와서는 정말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싸움을 시작했고
이 싸움의 끝에 내가 얻고자 하는 건 고작 협상에서 차지할 고지 몇 개인가?
우리가 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시작했기 때문에,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싸우는 동안
피가 터지고 찢기고 상한 것은 그 전쟁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이다.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죽어간 그의 표정을 보며
참혹하게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꼭 우리 아이들 같아서
윙윙 엔진 소리만 요란하던 비행기 안에서 입을 틀어막고 끅끅 숨죽여 울었다.
나는 이제 곧 다시 그 순간을 맞을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일지 마지막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짙게 드리워진 안개가 잠시나마 그들에게 싸우지 말라는 쉼을 주었듯,
지금의 이 시기가 그 쉼의 시간이 되길,
그리고 이 안개가 걷힌 후에는 부디 한 생명이라도 더 살아있을 때 종전의 전갈을 전할 수 있길,
엎드려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