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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dew Aug 20. 2023

르네상스 여행과 MBTI가 무슨 상관이라고?

계획은 있지만 계획안은 없고 목적은 있지만 목적지는 없다

그놈의 MBTI 타령...

세상의 다양한 인간들을 고작 16가지의 틀 안에 가둬놓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MBTI를 맹신하는 트렌드가 영 못마땅한 일인이지만 어떤 성향을 설명할 때에 이처럼 쉽게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는 표현도 없기에 종종 언급하게 됨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ISFP이다. 어떤 항목은 명확하게 한쪽으로 쏠린다기보다는 중간 언저리쯤에서 한쪽으로 살짝 기우는 수준이지만 그중에서도 목표에 대한 접근 방식은 분명, 판단형(계획형) J와 인식형(즉흥형) P 중, 단연 대문자 P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취약하다. 


J가 되고 싶었던 극 P 

응급 순간에 손 내밀 곳이라고는 없는 남의 나라에서 아이를 셋이나 낳고 키우는 삶은 애초에 계획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변수의 연속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즉흥적인 인간에게 맞춤인 삶같이 들리지만 모든 예측하지 못한 일에는 그로 인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대가라면 받아들이기에 따라 오히려 삶에 긴장을 더해주는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무계획 혹은 잘못된 계획으로 인한 차질(?)을 나와 가족, 특히 어린아이들이 함께 감당해야 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활력소일 수 없는 어려움, 혹은 재앙이 되기도 한다. 가뜩이나 안 맞는 성향에 최대한 예측이 가능한 계획을 세우며 변수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던 육아의 삶은 나에게 너무나 버거웠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자 특히나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아니, 가능케 해야 하는 ‘모성애’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던가. 그리하여 나는 점차적도 아니고 갑작스레 계획형 인간으로 변신해야 했고 이제는 라이프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에 그 과정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당연히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타고난 기질과 턱없이 먼 ‘현모양처’를 꿈꿨던 강렬한 동기 부여 덕분이었을까, 놀랍게도 난 그 일을 꽤 잘 해냈고 더 나아가 내가 진짜 계획형 인간으로 바뀐 줄로 믿어버렸다. MBTI 검사를 하다 보면 어떤 질문은 나의 성향과 선호도와는 달리 주어진 삶의 실제 모습은 반대인 경우가 종종 있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가령,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다소 즉흥적으로 움직입니다” 와 같은 질문 말이다. 당연히 나는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인간이지만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의 삶에서 내가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움직인 빈도는 지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이게 선호도와 상관없이 실제 삶에서의 결정에 근거해 대답하는 건지, 혹은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이 동하는 직관적이 느낌을 답하는 건지 아니면 결국 같은 건데 번역상의 오류로 애매한 표현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어떤 경우이던 일관적이지 못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들 때문에 그 정확성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긴 하다. 갑자기 이야기가 MBTI에 대한 비판으로 샜는데 어찌 됐건 결론은 꽤 큰 정신적, 실질적 비용과 시간을 쓰게 될 꿈같은 여행을 앞두고도 난 구체적인 실행 계획안을 거의(?)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P가 세운 나름 치밀한 계획

숙소를 사전에 예약해야 했기에 대략의 일정은 세워야 했다. 아마존에서 이탈리아 전도를 하나 주문하고 인터넷으로 숙소를 검색했다. 검색의 기준은 두 가지였다. 대부분 걸어 다녀야 하니 중심가에 가까워야 했고 난 안전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치안을 고려했다. 정보가 없던 시절에는 정보를 찾는 게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수많은 정보 중 필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게 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작업은 때로 구시대에 정보를 찾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도 한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분명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발전하고 편리해지고 있는데 그게 정말 우리의 삶을 더 유익하게 만들어주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이다.


지도가 도착하자 숙소를 정할 주요 도시 외에 꼭 가고 싶은 도시를 표시했고 거리와 동선을 고려해서 각 도시에 머무를 날짜를 정했다. 르네상스라는 분명한 주제가 있었기에 밀라노, 피사, 쏘렌토와 같은 주요 관광 도시이지만 르네상스에 큰 의미가 없는 곳은 제외했다. 도시 자체가 르네상스라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시작하는 게 맞겠지만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고대 문화의 부활’을 알기 위해서 로마의 고대 유적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로마를 거쳐 본격적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된 도시인 피렌체, 이후 피렌체와는 달리 지역적, 환경적 특색에 따라 그들만의 방식으로 르네상스를 발전시킨 베니스, 마지막으로 로마로 돌아와 바로크로 넘어가기까지 거장들이 남긴 완성형 작품들을 둘러보며 마무리? Wow~ what a plan~~~ 그리하여 로마 3박($592), 피렌체 4박($835), 베니스 4박($622), 그리고 마지막 로마 4박($572: 총 $2621)이 정해졌다. 호텔과 Air BnB 중 특별히 선호하는 곳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이미 여행이 한 달이 채 안 남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주요 호텔은 부킹이 끝났고 남아있는 숙소 중 평점과 가격이 괜찮고 2주 내 전체 환불이 가능한 곳을 예약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계획'과 '변수'의 만남

대략 3주간의 여행 계획에 고작 2시간이라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직업 여행가가 아닌 오늘의 삶을 살아야 했던 아이 셋 엄마에게는 겨우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건 단순한 우연이나 운이라고 볼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한 이끄심이라고 분명 말할 수 있을 만큼 2시간짜리 검색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위치와 기간이었다. 여행은 삶의 자리를 잠시 떠났다 오는 짧은 순간이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세상에 태어나 언제일지 모를 마지막을 향해가는 일상의 긴 여행이 아닐까. 그러니 일상의 삶의 그렇듯 여행 또한 ‘계획’과 ‘변수’가 만나 완성되는 흥미진진한 과정일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변수를 경험하는 스트레스보다 계획을 하기 위해 혹은 계획이 어긋날 경우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하는 스트레스가 더 큰 나에게 이 여행은 ‘괜찮아’라고 나를 다독여준 시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J로 살 때는 그렇지 못한 삶은 삽질과 손해, 낭비로 가득할 것 같았지만 삶은 결코 그렇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거든. 그리하여 나는 무수히 버리고 고치려 했던 나의 P를 사랑하기로 했다. 




왜냐면, 계획대로 되던 아니던 모든 인생은 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이번 여행은 사실상 모든 것이 변수의 연속이었지만 단연 내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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