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원작을 알아본 번역가에게도 감사
좋은 번역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글을 쓰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소설 번역가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알고, 글로도 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언어로 된 글의 묘미를 음미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 있어야 좋은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 경험에서 오는 확신이긴 하지만, 이렇게 애매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글을 안 쓰고 기술적으로 번역만 하는 실용서 번역가들도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신의 모국어를 정확히 아는 이가 번역을 잘한다.
내가 처음에 일본책 번역의뢰를 받아 일할 때 나는 내 모국어능력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걸 발견하고 절망과 우쭐함을 반복했었다. 내 언어의 빈곤함에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일본어로만 읽으면 내 머릿속으로는 다 알겠는데 그 문장을 그 느낌 그대로 한국어로 바꿔야 할 때 그것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표현을 찾아내야 하는 데 그게 어려워서 며칠을 고민하고, 적당한 표현을 찾아 고민하며, 썼다 지웠다 하는 요즘말로 개고생 을 했다. 내가 한국어를 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인데 한국어가 이렇게 딸렸던가 싶어서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번역가의 부족한 ‘자기 언어력’은 번역해야 할 원문의 훌륭함을 드러내지 못한다. 반대로 흔치는 않지만 원문이 비교적 후진데도 번역가의 멋진 번역 덕분에 멋지게 다른 맛으로 새롭게 창조적으로 가공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번역가는 자신이 창조하거나 더한 것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할 것이지만, 노래부르기처럼 자신의 타고난 음색과 기교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강의 소설들을 사랑해서 영어로 번역했다는 데보라 스미스는 영국인으로서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를 잘 다루는 사람일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걸 봐도 내공은 있어 보인다. 그녀의 한국어는 한국어학을 공부하는 기간과 한국학 석박사 경험이 전부라지만 그 공부기간이 그렇게 길 필요는 없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거다.
관권은 데보라스미스라는 외국인 번역가가 한강의 훌륭한 원작의 소설적인 표현들을 자신의 모국어(영어)로 어떻게 표현을 해낼 수 있었느냐 였을것이다. 20년, 30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과 똑같이 말을 하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로 된 소설을 더 잘 번역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문학작품의 번역은 확실히 차원이 다른데, 모국어(영어)로도 문학을 이해하고 즐기는 역량, 문학적 감수성, 탁월한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책 한번 번역하고 깨갱깨갱한 이후로 오래도록 다시 하겠다고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나의 짧은 모국어가 아직 해결이 안 된 것 같아서 자신이 없어서다. 번역도, 내 글을 쓰는 일도 하루아침에 되는 건 없다는 걸 알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꾸준히 지속되는 시간과 집중적으로 연마되어야 하는 오랜 글쓰기와 읽기 훈련이 필요하다.
번역도 별도로 장르가 있는 힘든 글쓰기다. 그래서 멘부커상이라는 세계적인 문학상은 원작가와 번역가가 공동수상자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한강의 훌륭한 글을 사랑하고 공감하며 울면서 번역했다는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씨의 공로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