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펭귄 Feb 01. 2021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결혼기념일을 위하여

한밤의 안개꽃 공수 대작전



  우리 집은 기념일에 목숨 거는 집안이 아니었다. 아빠도 엄마도 퍽 건조한 성격인 데다, 아빠는 자신의 생일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할 정도로 기념일에 무심한 사람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정도는 챙겨도 되었으련만 그런 날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지나가기 일쑤였다.


  다행히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우리의 생일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오면 가장 먹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고, 평소 좀처럼 욕구를 표현하는 일이 없는 비련의 둘째였던 나도 그날만큼은 당당히 치킨이 먹고 싶다고 외칠 수 있었다. 나름 일 년에 단 하루밖에 없는 소중한 날이 아니던가.    


  생일은 그렇다 치고,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다. 우리에게는 그저 흘러가는 날 중 하나에 불과했던 날들을 다른 사람들은 제법 정성스럽게 기념했다. 결혼기념일이라는 게, 저렇게 꽃다발에 케이크 초까지 불어가며 축하할 만한 날이었단 말이야? 그런 풍경들을 보면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렴풋이 서운하고 초라해지는 마음이 들곤 했다. 성대하기는커녕 쉬쉬하기에 바쁜 우리의 기념일이 왠지 늘 허덕이며 살아가야 하는 하루를 대변하는 것 같았으니까.  


 



  엄마와 아빠의 30주년 결혼기념일. 마침 주문이 없는 날이라 한가롭게 웹툰을 보며 점심으로 먹을 파스타를 만들었다. 파스타를 먹으며 무심코 달력을 보다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예전부터 엄마는 이상할 만큼 결혼기념일을 아빠가 챙겨주길 기대했지만, 기념일에 유독 무심한 아빠는 매년 우리가 상기시켜 줘야만 겨우겨우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언니와 나는 늘 아빠 대신 몰래 선물을 준비해 아빠가 준비한 척 엄마에게 전달해주곤 했다.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녹진녹진해지길 바라면서.

  올해도 엄마 몰래 아빠 대신 뭔가를 준비해야 하나, 귀찮은데 올해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마지막 파스타를 입안에 밀어 넣을 때까지 고민했지만 올해는 그냥 넘어가자, 는 결론으로 고민을 마무리지었다.


  변수가 생긴 건 저녁이 깊어 밤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누워만 있으니 달력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엄마가 설마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각,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는 나를 불러 자음판으로 '결혼기념일' 다섯 글자를 적었다.

  '아, 이런 젠장. 엄마가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으면 미리 뭐라도 준비할 걸.'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뭘 준비할까 머리를 빠르게 굴려봤지만 뭔가를 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낮부터 밖에 나간 아빠는 여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도 분명 모르고 있을 테지. 계속해서 잔머리를 굴리는 동안 엄마가 자음판으로 글자를 적었다.


  - 흰 안개꽃 사 오라고 해.


  엄마가 꽃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한 번도 꽃을 돈 주고 산 적이 없었고, 엄마 아빠를 닮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우리 집의 인테리어에 꽃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아빠가 엄마에게 꽃을 준 적도, 엄마가 아빠에게 꽃을 달라고 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꽃이 안개꽃 정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 밤에 안개꽃을 어디서 구한담.

  엄마를 두고 방으로 들어가 언니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잘하면 안개꽃을 파는 곳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급했던 그 날의 흔적.


  전화를 여섯 통 걸어도 아빠는 좀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게 있다는데, 엄마가 받고 싶다는데,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생겼는데. 동네에 있는 모든 꽃집에 전화를 걸어 혹시 지금 가면 안개꽃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 대부분의 꽃집이 전화가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한 군데에서 지금 당장 올 수 있다면 만들어 놓겠다고 했다.

  두 명 다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전화를 끊고 언니를 꽃집으로 보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아빠에게 최후통첩을 하듯 문자를 보냈다. 제발 지금 당장 빨리 와. 오늘이 마지막 결혼기념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오늘 엄마한테 꽃 못 주면 나 진짜 아빠 용서 안 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안개꽃을 줘야 했다.

    




  시린 입김을 뿜으며 언니가 꽃집에 다녀왔다. 걸음이 재빠른 언니는 채 30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꽃다발을 사 오는 데 성공했다. 늦은 밤이라 하얀 안개꽃은 구할 수 없어 분홍색 안개꽃 다발과 함께 돌아왔다. 다행히 늦게나마 문자를 확인한 아빠도 빠르게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엄마에게 꽃을 줄 수 없을까 봐 긴장했던 마음이 그제야 진정이 되었다.





  아빠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안개꽃을 구하느라 늦었다며 엄마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엄마는 한참 동안 말없이 꽃다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30년의 결혼한 세월 동안 남편에게 처음으로 받아본 꽃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참 동안 가만히 꽃다발을 쳐다보던 엄마가 말했다.


  - 이거 관에 넣어 줘.


  언니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방으로 뛰어갔다.

  리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엄마. 엄마가 받고 싶어 했던 안개꽃이야. 미처 하얀색을 구하지 못한 게 좀 아쉽지만, 분홍색도 나름 예쁘지?

   결혼기념일 축하해, 사랑해.

이전 25화 마지노선: 병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