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할머니 한분이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 일로 할머니는 고관절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수술이 시급했지만 할머니 연세로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결국 할머니 가족들은 수술을 포기했다. 할머니는 반으로 잘린 석고 고정판을 왼쪽 다리 아래쪽에 받치고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요양원으로 돌아오셨다. 평소 잘 웃으시던 할머니의 얼굴엔 고통만 남아 보였다. 할머니는 식사를 거의 못하신다.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나는 할머니를 위로하고 싶지만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못한다. 나는 할머니가 괜찮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는 자주 죽음을 마주한다. 더 자세하게는 죽어가는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마지막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이때 나는 고통에 일그러진 죽어가는 이와 이별의 슬픔이 여실히 드러난 보호자의 얼굴과 달리 덤덤한 표정을 유지한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와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 사이에 서있다.
사람들이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 말 대로라면 죽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삶을 원하는 만큼 즐겁게 살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며칠 앓다가 죽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아픈 노인들은 삶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죽음의 몇몇 징후가 보인 후에도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죽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일은 환자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곁을 지키는 이에게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다. 지긋지긋한 고통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삶이 끝날 것 같은 날이 오지만 생(生)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노인은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갈수록 길어지는 며칠의 최종적인 관문을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호흡을 멈추고 삶을 마무리한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단숨에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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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할머니 머리 위로 매달린 링거 줄도 늘어갔다. 잠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나를 그만 보내라'고 소리쳤다. 몇 마디 짧은 비명을 쏟아낸 후에 다시 호흡기에 의존해서 잠이 들었다. 이를 목격한 보호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한쪽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새우처럼 구부린 채 선잠을 청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와 보호자들은 누가 더 아픈 것인지 모를 초췌한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묵묵히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비위관에 영양 액을 투입하고 눈을 감은 할머니께 평소처럼 인사를 건넨다. 그것이 내 일이었고 나는 슬픔조차 드러낼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와 보호자, 우리 모두는 할머니의 마지막 삶을 위해 꽤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늘 두렵다. 더러는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듣기도 한다. 직접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해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음의 외형적인 모습은 볼 수 있지만 죽어가는 이의 마음은 볼 수 없다. 대부분의 환자는 죽음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사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어떤 느낌인지 직접 물어볼 수 없다. 그저 짧아진 들숨과 길어진 날숨의 거친 호흡소리만 들릴 뿐이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잡았던 손을 떨어뜨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과연 죽음의 순간에 환자의 마음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직 환자의 의식이 온전할 때 그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반응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백여 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죽음을 두려워했다. 나 역시 죽음이 두렵다. 나는 그들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죽음 자체가 두렵다기보다 죽기까지의 과정을 두려워한다는 것. 나 역시도 그게 제일 두렵다.
아슬아슬한 게 삶이다. 그래서 삶은 더 극적이지 않을까. 출처. pixabay
젊거나 아직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요양원을 방문하는 봉사자나 노인들을 보살피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직접적인 표현은 숨기지만 개인적인 기준의 죽어도 괜찮은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저 정도 오래 살았으면 뭐'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 기준의 대상은 늘 남이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삶의 마지막이 죽음인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아직 나는 아니야'라고 말한다.
6년 동안 백여 명의 삶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막연하게 기다렸다. 입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내심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꺼려했다. 다른 이들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실제 죽어가는 과정을 알고 싶어 했다. 죽음에 대해 겉모습만 알고 있던 사람과 죽음의 과정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의 마지막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전자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두려움에 떨었다면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때가 되자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고 삶이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럼없이 생각하던 사람들은 곧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올 것을 알았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과 또 다른 보호자인 나를 위로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건 준비된 생각의 힘이 아닐까 싶다. 죽음의 실제 과정을 미리 마주하고 삶과 공존하는 죽음을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두려워 떨며 죽음을 생각하거나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 인류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준다. 우리만 죽는 것이 아니니까.
삶이라는 이야기의 마침은 죽음이다. 결코 피할 수 없다면 당당히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부디 타인의 죽음에는 관대하고 자신의 죽음에만 반쯤 감았던 눈을 떠 보기를 바란다. 미래의 죽음을 떠올리는 연습은 분명히 현재의 삶을 더 소중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것이고 삶의 질은 높아질 것이 확실하다. 행복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