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
그림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아줌마가 평생교육원을 통해 처음 연필드로잉과 수채화를 배웠습니다. 입시 미술이 아닌 성인 취미 미술이라 기본기 없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선생님의 지도 아래 그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스케치북에 그렸던 제주의 풍경들을 그림과 짧은 글로 소개합니다.
스케치북을 장만했다.
AQVARELLE ARCHES ROUGH 100% COTTON
20 sheet-300g/m-27.3x16cm
스케치북 내지에 적힌 스케치북의 스펙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르쉬의 황목 스케치북.
오래 두고 볼 그림들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림 솜씨가 좋아야겠지만, 그리다 보면 언젠간 마음에 드는 그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저기 이 종이 저 종이에 이것저것 되는대로 그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주제를 정해서 애정을 갖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스케치북에 제일 앞장에 그리는 그림은 표지 느낌이었으면 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공간을 맨 앞에 그려 넣고, 이 스케치북을 펼 때마다 뿌듯하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난 공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까멜리아. 매주 수요일, 목요일마다 챙겨보던 드라마가 끝나가는 아쉬운 마음을 그림에 잡아두고 싶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빙삭이 미소 짓게 될 공간이다.
간단 줄거리. 외지에서 굴러들어 온 미혼모 동백(공효진)이 마을에 밥술집을 열어 생계를 꾸려간다. 마을 아줌마들은 예쁘고 여리여리한 동백과 까멜리아가 매우 거슬린다.
건물주 홍자영(염혜란)도 남편 노규태(오정세)의 카드명세서에 까멜리아가 자주 등장하는 게, 신경 쓰인다. 동백과 규태를 의심한다.
순경 황용식(강하늘)은 편견 없이 저돌적으로 촌스럽게 돌진하며 동백이와 로맨스를 만들어 간다. 거기에 첫사랑 강종렬(김지석)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사람들이 사는 게 징글징글할 때 술 마시러 오잖아요.
그니까 나는 웬만하면은... 사람들한테 다정하고 싶어요.다정은 공짠데... 서로 좀 친절해도 되잖아요...”
극 중 동백이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동백이의 대사.
친엄마가 고아원에 두고 간 아이 동백. 파양 된 아이, 고아여서 당했어야 하는 수많은 설움과 오해.
그 와중에 첫사랑은 유망한 야구선수라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했던 여자. 사랑했던 사람에게 아이의 존재를 숨기고 잠적한 후 미혼모로 살아가는 박복한 여자 동백이....
박복한 여자가 다정을 이야기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본인이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텐데, 남에게는 다정하고 싶고 친절하고 싶은 사람 동백이 더욱더 사랑스러웠다.
그 동백이 까멜리아에서 밥에 다정과 친절을 담아 판다.
미혼모라는 편견, 술집(밥집이지만)을 하는 여자에 대한 편견, 결핍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 여전히 나는 편견이 많은 사람이지만,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편견 있는 내 모습을 부끄러워했었다. 살면서 이런 편견들은 가끔은 깨지기도 하고 더러 고착되기도 한다. 변화무쌍하다. 마치 한여름 뭉게구름 가득한 하늘처럼 내 마음도 이리 뭉쳤다 저리 뭉쳤다 한다. 어쩌겠나. 나는 성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아지트에 대한 동경이 있는 걸까. 전에 <나의 아저씨>에 나왔던 “정희네” 술집을 그린 적이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그린 그림 두장이 다 어둡고 낡은 술집이라는 건 좀 공교롭긴 하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 풍기는 단정한 자세와 향기. 그리고 사람이 모여드는 공간이 좋다.
그림을 그리자면, 자세히 보아야 한다. “까멜리아”의 외관은 예쁘면서도 정성스러웠다. 주인공처럼 다정하다.
2층 건물을 다 덮은 담쟁이도 사랑스러웠다. 마당에는 측백나무로 보이는 초록색 나무가 있었는데, 그리는 사람 마음대로 동백나무로 바꿔 그렸다. 이게 그리는 재미 중 하나이다.
동백이가 운영하는 까멜리아인데, 동백나무 한 그루 정도는 있어줘야지 않나.
아마 동백이도 세입자가 아니고 건물주였다면 동백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담을 헐고, 애기동백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가 11월에 종영되었기 때문에 그즈음에 피어났을 애기 동백을 심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한겨울에 종영됐다면 겨울에 피어 봄까지 살아있을 토종동백을 심었겠지. 가게 오른편 입구엔 아름드리 벚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도 포항 구룡포 마을에 가면, 드라마 촬영지와 카페가 된 까멜리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래 유지되고 잘 관리되었으면 좋겠다. 실물로 볼 수 없다면 그림을 봐도 되지만, 실제로 가 보고 싶은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