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노을 마니아
제주를 그렸던 스케치북의 진짜 제주의 첫 그림은 이호테우의 말등대와 노을이다.
이호테우의 노을 그림에 글을 붙여보려고 그림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때 생각나는 단어 하나. “노을 성애자“
그리고 그 단어를 처음 들었던 영화 <변산>
<변산>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로 주연배우 김고은, 박정민이 고향인 변산에서 재회한 이야기이다.
변산? 그래, 변산에도 노을이 있었지. 부안의 옆 고장에 살았는데, 내 기억 속 변산의 노을은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감동적이진 않았다. 노을이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때는 자연이 너무 당연해서 노을이 예쁜지, 신기한지 모를 나이였다.
영화에서 박정민은 6년째 쇼미 더 머니에 지원 중인 무명래퍼로 나온다. 그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 변산으로 내려온다. 잠깐 다니러 온 상황에 변산에서 살고 있는 동창, 선배들과 엮이게 되고,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첫사랑이 김고은이 아니라는 반전과 박정민의 첫사랑이자 여우 같은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했던 신현빈 배우. 영화를 다 보고 난 내 총평은 그리워할 고향이 있거나, 시골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추억할 시골감성 충만한 청춘영화라는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서 선미(김고은)는
내가 '노을 마니아'라고 했지. 나한테 노을을 발견시켜 준 사람이 너야. 수없이 본 노을인데, 노을이 그런 건지 처음 알았지. 장엄하면서도 이쁘고, 이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저리 고울수도 있으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겠다.
고 말한다. 그리고 학수(박정민)는
수평선 위에 빈 하늘이 노을이 지니까 꽉 찬 하늘이 되어서
노을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은 줄거리나 장면보다는 “노을 성애자”라는 단어하나로 축약되어 있었는데, 영화에 나온 단어는 노을 성애자가 아닌 “노을 마니아”였다니.
그렇다면 “노을 마니아“를 “노을 성애자”로 착각하고, 나도 ”노을 성애자“라고 주장한 나는 ”노을 성애자“인 걸까 ”노을 마니아“인 걸까.
제주에 와서 어쩌다 매일 하늘 보는 낙으로 살게 된 나는 해 지는 시간이면 좀 분주하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밥 짓다 창문 한번 보고, 국 끓이다 베란다 나가보고 하는 식이다. 노을은 순간이라 맘과 눈이 바쁜 것이다.
해 지는 시간에 바닷가에 있는데 노을까지 환상적이라면, 그날은 로또 맞은 기분이 든다. 함덕이든, 이호테우든, 사라봉이든, 도두봉이든 해 지는 시간에는 바닷가에 있고 싶다.
좀 힘에 부치거나 마음이 삭막한 하루를 보냈다 하더라도, 붉은 하늘을 보고 나면 힘이 난다.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렇게 예쁜 노을을 볼 수 있는데, ‘아무렴 어때. 이게 행복이지.’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어차피 노을처럼 곧 사라질 마음이지만…)
제주에 산지 9년 차, 대략 3천 번의 해가 지는 동안 매일 노을을 눈으로 좇고, 사진으로 찍고, 때론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기록해 왔다.
이 정도면 나도 노을 마니아 아닌가.
사진은 그림과 또 다른 감동이 있으니 원본 사진도 함께 공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