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기억 너머의 윤슬
* 브런치에는 책의 일부만 공개합니다. 오늘은 3장의 한 꼭지를 먼저 올립니다. 책의 흐름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조각으로, 전문은 독립출판물로 남겨두었습니다. 이 글이 마음에 닿는다면, 책에서 나머지 이야기들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겨울 바다의 찬 바람, 새파란 물결이 시린 땅에서 빨강은 바지런히 피어난다.
송이째 떨어져 지는 동백은, 지고 나서도 통영의 땅을 붉은 점묘화로 만들었다.
서른이 지나니, 엄마와의 과거도 동백꽃처럼 그렇게 송이째 떨어지는 축복이 찾아왔다.
20대에는 엄마가 그렇게 나를 반대했던 이유를 찾고 싶었다.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 혹은 엄마가 인정할 만큼의 ‘남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성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직업, 직장이든 혹은 돈이든, 그 너머 결혼이든.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남과 비교할 때면 쉽게 화가 나기도 했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어린아이는 눈치도 없이 매번 올라왔으니까.
그래서 쉽게 엄마를 원망했다. 한쪽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를 탓하는 편리함을 택했다. 불안과 결핍, 비교의 기제는 모두 엄마로부터, 혹은 엄마 때문이라고 탓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엄마와 딸의 인연이란 탯줄로 시작되어 서로의 생명을 나눠 가진, 생사의 경쟁자였던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딸은 엄마를 먹고 자라야 했으니까. 엄마의 시공간을 빨아들이면서. 엄마는 모든 것을 주면서도 때론 기생하는 작은 것이 위협적이었을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엄마와의 관계 속에 원인과 정답을 찾아야만 한다고도 생각했다. 지나온 상흔을, 명암의 시간을 헤집어야 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스스로 쟁기가 되고, 또 소가 되어 과거라는 그 밭을 갈아엎는 일에 용기가 부족했고, 이해의 반경도 넓지 않았다. 엄마와의 과거를 다시 쓰는 것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덧대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10년이 쌓였다. 세상으로 나가 풍화작용을 어느 정도 겪은 후에야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을, 그저 흐르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래된 과거를 직면하고, 지나온 시간을 살펴볼 용기도 생겼다. 그동안 상흔에 새살이 돋아난 지는 꽤 오래되었고, 탈각한 일도 없잖아 있었다는 것도 마주했다.
예전에는 엄마와의 관계 속에 무언가 정답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답을 찾는 것보다, 모르는 채 시간을 건너는 일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들이 있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채로 나아지는 날이 오는 것처럼.
20대 내내 홀로 쌓은 돌과 모래와 물은, 결국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고, 결국 다시 나를 세웠다는 것도. 그 세계를 쌓아 올린 대지가 결국 집이고 엄마였다는 것을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엄마의 서른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게 됐다. 작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키워내고, 발전하는 가정을 꿈꿨던 청춘을. 엄마의 30대와 나의 30대가 겹쳐 보일 때, 오래된 상처에 갇혀 있던 것도 오히려 나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란 모두 불완전한 걸 알면서도, 나는 부모님께 불가능한 "완전함"을 바랐던 것 같다.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건 엄마의 말도, 불안도 아닌, 내 생각은 아니었는지.
엄마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동백꽃처럼 그냥 떨어뜨렸다.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나에게만 적용됐던 비극으로 여겼던 그 과거까지도.
이제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다. 지나간 과거와 그때의 마음을 끝내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니까. 엄마와의 갈등의 섬 하나도, 이제는 그저 바다에 두기로 했다. 더 이상 우리에겐 그 섬이 항로를 바꿀 만한 의미가 아니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흐려지고, 또 바래지고, 깎여서 원망과 자책 없이 다시 직면하기까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여전히 그 바다의 파도다. 멀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물결처럼. 떠나야만 알 수 있었던 것들, 그러나 같은 바다였기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는 내 안의 고향이었고, 나는 그 바다 위 하나의 파도였다. 어쩌면 우린 평행선이 아니라 닮아있는 곡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빨간 눈송이가 나린 것처럼, 동백은 피고 지는 순간 모두 세상을 제 색깔로 물들였다는 것도 그때 제대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