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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Jul 23. 2021

지랄 발광해도 괜찮아 2

나의 노래자랑 연대기

결혼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문학과에 편입했다. 수원에 있는 경기지역대학에 다녔는데 영문학과 임원으로 일하는 언니들과 학습 동아리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문학과와 학교 일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축제를 개최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바로 노래자랑이었다. 영문학과에서는 한 번도 노래자랑에 출전한 학생이 없었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고민할 것도 없이 신청서를 냈다. 그 덕분에 영문학과에서 플래카드와 응원단 등 열띤 후원을 받았다. 곡명은 이번에도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Missing you’였고 또 새 옷을 입고 참가했다. 강당에서 하는 예선전을 거쳐서 10팀 정도가 결선 무대에 올랐다. 나는 그 대회에서도 개인기를 준비했다. 이번엔 학생답게 교수님들 성대모사를 준비했다. 방송대의 특성상 온라인에서만 뵙는 교수님들의 강의 스타일을 흉내를 내었더니 학우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날 대회가 끝나고 교내 밴드에서 보컬로 영입 요청이 들어오고, 모르는 학우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다 보니 내가 연예인이 된 듯한 후유증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방송대를 졸업하고 평택시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내게 최후 목표의 무대는 ‘전국 노래자랑’이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우리 시에서 개최하는 전국 노래자랑 예선전에 출전했었다. 예선에 5백 명이 왔고 30명을 뽑는 1차 예선에 통과했지만 15명을 뽑는 최종 예선에는 떨어졌다. 그래서 2차 예선 탈락의 아쉬움 안고 평택시에 다시 도전했다. 우리 동네는 젊은 사람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했지만, 평택시는 예심에 300명 정도가 참가했고 나이 드신 참가자가 많아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 노래자랑 예심현장에는 텔레비전 본방송을 초월하는 재미가 있다. 전국 노래자랑 방송을 보면 야외 녹음 방송이어서 그런지 참가자들의 노래 실력이 실제보다 반감되어 나온다. 그러나 체육관의 예심현장은 놀라웠다. 그 지역의 노래 잘하고 별난 사람들은 다 오는 곳이 전국 노래자랑 예심현장이다. 전국 노래자랑 참가자들의 기가 막힌 노래 실력과 기상천외한 장기자랑을 구경하다 보면 내 예심 차례가 온다. 다른 참가자들에 비하면 한없이 평범한 나의 참가곡은 김건모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다. 전국 노래자랑의 90% 참가곡의 장르는 트로트지만 나는 트로트를 즐기지 않아서 아는 곡도 그다지 없었다.      


전국 노래자랑의 예심은 체육관에 가서 번호표를 받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런 다음 1차 예심은 무대 위에 심사를 맡는 프로그램 작가 앞에서 열 명씩 올라가 대기한다. (이 작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말이 작가지 현장에서의 느낌은 PD를 능가한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자기소개하고 무반주로 노래를 한다. 작가는 첫 몇 소절만 듣고 ‘땡’과 ‘합격’ 소리를 사정없이 참가자들에게 내뱉는다. 나는 다행히 합격을 받았다. 그런 다음 2차 예심을 위한 서류를 준다. 거기에 자기소개, 곡목, 장기자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등을 작성한다.     


2차 예심이 시작되었다. 1차 때와는 확연히 다른 긴장된 공기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노래방 반주에 1절을 다 부르면 운명이 정해진다. 영광스럽게도 2차까지 합격을 했다! 이제 녹화만 하면 방송에 나오는 것이다! 나는 축제와 같은 현장 분위기에 들뜨고 내 성취감에 들떠서 정신을 거의 놓을 지경이었다. 2차 예심이 끝나고 작가가 합격자들을 소집했다. 타 도시와 다르게 장기자랑 분량이 너무 없어서 쥐어짜기 위해서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통령 성대모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려는데 평택시 농산물 담당 공무원이 송해 아저씨와 상을 차려놓고 만담을 하는 것을 권유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연기까지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보다 더 끼가 많고 우렁찬 목소리의 근처 아파트 부녀회장 아주머니가 송해 선생님과 콩트를 맡기로 했다.      


녹화 날이 되었다. 역사에 길이 기록된 오늘을 위해 언니와 쇼핑한 새 옷을 장착하고 우황청심환을 먹은 후 신랑과 먼저 녹화장에 도착했다. 그 뒤 친정엄마와 형제들, 시어른들도 모두 도착했다. 그 큰 체육관 1, 2층이 관객으로 꽉 채워졌다. 신랑 회사 사장님께서 후원해주신 플래카드도 2층 왼쪽 난간에 훤하게 달아놓았다.     

곧 총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악단장 아저씨가 왜 여자가 남자 노래를 부르는데 키를 낮췄냐며 원래 키로 하라고 했다. 김건모 노래는 남자 노래지만 여자 노래만큼 키가 높아서 안전하게 부르기 위해 낮춘 건데 그렇게 면박을 주니 부끄럽고 앞이 캄캄했다. 그분 말이 법이니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반쯤 포기하고 목에 좋다는 마른 다시마와 호올스를 열심히 먹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게 심장이 뛰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어찌나 심장이 뛰는지 빗장뼈가 튕겨 나갈 것 같았다. “다음 출연자분 어서 오세요!” 송해 선생님이 나를 부른다. 자기소개하고 정신없이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성대모사를 메들리로 해치운 다음 이제 노래할 차례다. 전주가 시작되었다. 무대를 왔다 갔다 가볍게 춤을 추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아 어쩌지! 하이라이트로 가면 갈수록 키가 너무 높다. 올 것이 왔다. 후렴 부분에서 아주 시원하게 삑사리를 냈다. 그러나 땡! 이 아닌 딩동댕 실로폰 소리를 듣고 후다닥 무대를 내려왔다. 녹화는 끝이 나고 나는 아무 상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병풍처럼 서서 수상자들을 위해 열심히 손뼉을 쳐주어도 뿌듯했다. 내 목표를 이룬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출연료로 농협 상품권과 KBS 로고의 손목시계를 받았다. 농협 상품권으로 밥솥을 장만하고 시계는 시어머니를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자랑스럽게 손목에 차고 다니셨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평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쓰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죽기 전까지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돼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가진 능력치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 10대 시절부터 결혼 후 30대까지 나는 열심히 무대에 섰고 노래로 보여 줄 수 있는 ‘지랄 총량’을 다 썼다. 그 모든 무대를 통해 처음엔 대단한 줄 알았던 ‘나’부터 마지막엔 그저 동네 노래방 스타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여한 없이 ‘나’를 쏟아내자 나는 더 안정되었고 더 여유로워졌다.      


엄마의 끼를 물려받아 매년 봄마다 개최하는 아파트 주민 노래자랑에 나가서 피는 물보다 진함을 깨우쳐 주는 우리 딸과 노래자랑에서 받는 상품이나 상금보다 옷값이 더 나가도 마누라가 서는 어떤 무대에 따라와 묵묵히 꽃돌이가 되어 주었던 신랑이 있어서 나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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