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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May 10. 2023

행복한 양치기

  펜 플룻은 대나무 또는 갈대를 엮어서 만드는데 파이프 악기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관악기 중 하나다. 이 악기는 언뜻 들으면 바람 소리나 허스키한 휘파람 소리 같아서 삼복더위에 들어도 옆구리에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스산하다.

  펜 플룻 연주곡 중에 대중적인 작품은 「외로운 양치기(The lonely shepherd)」다. 이 곡은 독일의 제임스 라스트(James Last)가 작곡하고 1977년 루마니아 출신 게오르규 잠피르(Gheorghe Zamfir)가 연주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곡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하는 곡 중 하나다. 그곳에 도착하면 열일곱 소녀를 만나게 된다. 


  중학교부터 20대 초반까지 살았던 부산 학장동은 사상공단의 남쪽에 있다. 중학교 친구들은 공장 노동자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중학교 때 나는 에너지가 넘치고 산만해서 까불다가 교무실에 자주 불려 갔다. 호기심이 많았고 뭐든 빨리 배웠으며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 노래, 춤 다방면에 재능을 나타냈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장이나 시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술에 취해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오면 지치지 않는 부부 싸움이 시작됐다. 실질적으로 엄마가 가장이었던 우리 집은 늘 돈에 쪼들렸지만, 사는 게 고만고만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기죽지 않고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상업계 고등학교에 가서 졸업 후 돈을 벌기를 바랐던 엄마의 뜻과 반대로 떼를 써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선택을 후회했다.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에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비싼 브랜드였던 마리떼 프랑스와 저버나 써지오 바렌테 청바지부터 우리 집에 없던 비디오 플레이어, 정성스러운 도시락까지 그들과 있으면 기가 죽었다. 

  나는 80년대 잠깐 존재했던 교복 자율화 마지막 세대여서 학창 시절 한 번도 교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교복 대신 중학교와 고등학교 복장 규정은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 착용이었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바지를 입거나 단속을 대비해서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입었다. 그런 학생을 잡기 위해 복장 단속 선생님은 8시 30분부터 교문에 저승사자처럼 나와 있었다. 나도 바지를 입은 날에는 늦어도 8시 20분까지 등교해서 선생님을 피하곤 했다. 

  그날도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30분이나 일찍 교문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바지를 입은 아이들이 저승사자에게 잡혀 줄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잡히기라도 하면 매 맞고 벌서는 것은 물론이요, 화장실 청소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감해하며 반 친구 두 명과 십 분이 넘도록 교문 안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서 학교 앞에 사는 은경이가 껌을 씹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보였다.

“와 안 들어가고 서있노?” 은경이가 물었다.

“지금 바지 입고 온 애들 다 잡고 있다 아이가.”

“그래? 그러면 우리 집 가서 퍼뜩 갈아입자.”

“느그 집에 가자고?”

“어, 우리는 딸이 많아서 치마 많다. 얼렁 가자.”

우리는 딸 부잣집 은경이네 가서 치마로 갈아입고 무사히 교문을 지났다. 

  나는 은경이와 몇 마디 나눠 본 적이 없었다. 큰 키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남학생과 미팅 얘기를 해주던 은경이에게 그런 곰살맞은 데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만약 나였더라면 교문에서 곤경에 빠진 친구들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정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집에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데리고 가서 치마로 갈아입히는 인정머리는 애당초 내겐 없었다. 여유 있고 싹싹한 친구들 옆에 있으면 인색하고 날카로운 내가 초라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신발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살림살이, 사이좋은 부모, 구김살 없는 아이 하나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때의 생기는 사라지고 온전히 나를 보여줄 수 없어 외로운 나날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달에 한 번씩 짝을 바꿨는데 6월에는 ‘안 미나’라는 친구와 짝이 되었다. 그 친구는 얼굴이 하얗고 각도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머리숱에 앞머리는 얄밉게 작은 핀으로 꼽고 다녔다. 뽀얀 피부에 별명이 ‘소 눈’ 일만큼 큰 눈에다 여러 겹 쌍꺼풀이 예쁜 아이였다. 키도 컸는데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걷다가도 앉으면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수업 시간에는 사전을 베개 삼아 숙면했지만,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미나에게 괴상한 취미가 있었으니 한 달에 한 번 바뀐 짝의 손가락 털을 뽑는 일이었다. 짝이 바뀌면 짝의 손을 잡고 손등 털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난달 짝이었던 영선이의 하얀 손을 보더니,

“옴마야! 하얗기도 하지 털이 맛있게도 생겼네!” 하며 기다란 손톱을 세워 열심히 뽑아댔다. 

이번 달 짝인 내 손을 보고서는 

“와 이리 누리끼리하노? 살도 없고 털도 보이지도 않네.” 하며 실망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열심히 내 손등 털을 뽑았다. 

  며칠 후 음악 선생님이 기악 시험을 본다고 말했다. 어떤 악기여도 상관없고 자유곡으로 1절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실기시험 걱정에 야단법석을 떨었다. 내가 다룰 줄 아는 것은 리코더밖에 없으니, 악기는 정해졌다. 문제는 선곡인데 흔하디흔한 리코더지만 이왕이면 그럴싸한 곡을 연주하고 싶었다. 교과서에 실린 가곡이나 누구나 다 아는 가요도 하기 싫었다. 그때 생각난 곡이 바로 ‘외로운 양치기’였다. 이 곡을 피아노 반주에 맞추면 근사할 것 같았다. 그런데 미나가 피아노로 비틀스의 ‘Yesterday’를 친다는 게 아닌가. 나는 짝에게 ‘외로운 양치기’의 반주를 부탁했다. 그 아이는 흔쾌히 응했고 몇 번 만나 연습해 보기로 했다. 미나는 조용한 성격이라 속을 알 수 없어 은근히 눈치 보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책잡히기 싫어 계이름을 달달 외워 입술에 쥐가 나도록 연습했다. 

  대망의 실기 시험 날이 왔다. 우리는 각자 가져온 악기를 챙겨 음악실에 갔다. 음악실은 교문과 가장 가까운 1학년 동 맞은편 건물 3층에 있었는데 늘 해가 깊게 드리워 겨울에도 따뜻했다. 교회 의자 같은 니스칠한 진갈색 나무 벤치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고, 맨 앞 오른쪽에는 선생님 책상이, 해가 드는 창가 쪽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그날 가장 많이 가져온 악기는 리코더, 하모니카, 통기타 순이었다. 우리는 번호가 불리면 앞에 나가 연주를 시작했다. 한 시간 안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의 연주를 평가하려면 선생님은 1분 남짓 듣고 ‘그만’을 외쳤다. 리코더와 하모니카의 삑사리가 난무했고 긴장해서 그랬다며 다시 하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중 한 친구가 통기타로 이승환의 ‘텅 빈 마음’을 연주할 땐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떼창이 터져 주의를 받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심장이 어찌나 뛰는지 쇄골뼈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미나는 피아노 앞에 앉고 나는 그 옆에 섰다. 먼저 피아노가 잔잔하게 깔리고 내게 눈짓으로 시작하라는 사인을 주었다. 

 “투, 투, 투, 투, 투, 투, 투 투루루”

‘외로운 양치기’의 첫 소절이 시작되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오래된 나무 냄새나는 음악실은 안개에 휩싸인 프로방스 초원으로 바뀌었고, 나는 몇 주 동안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채 말도 통하지 않는 양들을 바라보며 마을에서 오는 소식만을 기다리는 외로운 양치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1분이 지나도록 ‘그만’을 외치지 않았다. 아이들도 잡담을 멈추고 나의 연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3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외로운 양치기’를 좋아한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 곡을 들으면 화가 났더라도 차분해지고 우수에 젖게 된다. 그런 다음 타임머신을 타고 여고 시절 음악실로 향한다. 그곳에서 커다란 눈에 입을 앙다물며 피아노를 치는 미나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 짝 덕분에 외롭지 않았던, 하얀 리코더를 불고 있는 나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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