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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Mar 06. 2024

그때 그곳에 가장 적절한 사람

흥남철수 이야기 2

  *운명 運命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먼저 運(운)은 辶 갈 착과 軍 군사 군이 합쳐진 것으로 ‘군대가 간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전쟁에서 군대가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命(명)은 亼 모일 집, 口 입 구, 卩 병부 절이 결합한 모습으로 亼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긴 고대의 신전이고, 口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목소리를 나타내며, 卩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 모양이다. 즉 신전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명령에 무릎을 꿇은 채 귀 기울이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를 합치면 운명 運命이란 하늘이 내린 뜻을 향해 가는 것이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의 마지막 상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 Meredith Victory 호는 피난민에게만 운명의 배가 아니었다. 그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1914년~2001년)도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3일간의 항해 후 하늘의 명령에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여야 했다.      

  라루 선장은 펜실베이니아 주립 선원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수료한 뒤 조타수로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1942년 무어 매코맥 사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바다에서 12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여했으며, 건조된 지 5년 된 1만 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으로 1950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1950년 12월 22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라루 선장은 갑판에서 쌍안경으로 부두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있는 언덕을 향해 미조리함이 포탄을 쉴 새 없이 쏘며 저지선을 막고 있을 때, 정박해 있는 배 사이에는 엄마 등에서 떨어진 아이들 시체가 둥둥 떠 있었다. 목선을 타기 위해 영하 30도의 추위에 바닷물에 들어가 애원하는 사람들과 공포에 질려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이윽고 미군 대령 몇몇이 배에 타서 피난민 수송을 묻자 선장은 짐을 다 내리고 사람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태우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일등 항해사였던 러니(James Robert Lunney, 1927년~2022년)에게 배에 타는 피난민의 숫자를 세라고 명령했고 하루가 꼬박 걸려 피난민 14,000명을 태웠다.      

  배에 오른 피난민들은 어디로 가는지 그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했다. 항구를 빠져나가면 무선전신도 끊긴 상태로 항해해야 했고 가장 큰 문제는 흥남항 근처 50㎞ 해역에 북한이 깔아놓은 소련제 기뢰 4000여 개 위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기뢰 탐지기 하나 없었다.      

  선원들은 물도 식량도 화장실도 없는 배에 말도 통하지 않는 14,000명 피난민을 실은 뒤 공포를 느꼈다. 그들이 배고픔에,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 폭동이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부두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출발했고 배는 건조된 후 처음으로 전쟁 물자가 아닌 생명을 가득 싣고 남쪽으로 떠났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흘 후 생명을 잃은 사람 하나 없이 오히려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14,005명이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 많은 인원이 땅을 밟는 데도 16시간이 걸렸다. 피난민들은 내리면서도 질서를 지켰고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선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선원들은 피난민들이 내린 뒤 배를 점검했다. 갑판과 다섯 개의 화물칸 어디에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피난민들이 남기고 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오물이 2m 가까이 쌓여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피난민들이 어떻게 3일이나 버틸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배를 일본 사세보로 옮겨 오물을 걷어내고 청소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소금물과 레몬 파우더로 닦아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1960년 8월 24일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되어 “용감한 배(Gallant Ship)”로 명명되었다. 베트남전(1964~1975)에서도 활약하다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한편 라루 선장은 한국 전쟁이 끝나자 돌연 사라졌다.   

  



*강기진, 『오십에 읽는 주역』, 유노북스, p.44

*사진 : 연합뉴스 201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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