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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Mar 08. 2024

그때 그곳에 가장 적절한 사람

흥남철수 이야기 2

  5년간 행방이 묘연했던 라루 선장은 1960년 8월 24일 “용감한 배(Gallant Ship)” 시상식에 나타났다. 그를 찾아 대중 앞에 서게 한 사람은 바로 일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훗날 해군 제독 소장이 되었다)였다. 그가 선장을 찾은 곳은 바다 위가 아니라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St. Paul's Abbey)’이었다. 


  선장의 회심은 1954년 도쿄의 미 육군병원에서 신장염 수술을 받은 후에 이뤄졌다. 입원 당시 마흔 살이었던 그는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 그에 관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했다고 한다. 완쾌 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병원에서 존경하던 군종신부가 베네딕도회 소속 신부임을 알게 되었다. 신부는 라루 선장의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가까운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뉴저지주 뉴튼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또는 뉴튼 수도원)이라고 선장에게 일러주었다. 

  마침내 1954년 선장은 수도원행을 택했고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으로 수사가 되었다. 그는 1960년 시상식을 끝으로 러니를 제외한 기자나 정치인 등 그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40년 동안 침묵과 노동으로 수사의 삶을 살았다.      


  한국에서 라루 선장이 알려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뉴튼 수도원에 1970년대부터 수도자가 되겠다는 이가 줄기 시작해서 30년 동안 거의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2000년도 초 수도원 측은 베네딕도회 총연합 측에 다른 수도원이 뉴튼 수도원을 인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연합회 측이 지목한 뉴튼 수도원의 인수자는 바로 한국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었다.

  뉴튼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의 인연은 공교롭게도 한국 전쟁으로 맺어졌다. 1908년 독일 신부들이 함경남도 덕원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한국의 젊은 수도자들과 함께 50명이 함께 생활하는 규모가 큰 수도원이었다. 이곳은 교육 사업과 의료, 육림育林, 양봉을 도입해서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한국 전쟁이 나면서 공산 정권의 박해를 받게 되고 수도자들 가운데 무려 38명이 순교를 당하고 수도원도 강제 폐쇄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겨우 목숨을 건진 독일 수도자들조차 감금과 고문을 견디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살아남은 한국 수도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곳이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이다. 이때 자리를 잡을 수 있게 준비 작업이 이뤄진 곳이 바로 ‘뉴튼 수도원’이었다.      

  왜관 수도원은 140명의 수도자가 있는 전 세계 성 베네딕도 수도원 중 규모가 큰 수도원으로 성장했다. 2001년 왜관 수도원은 뉴튼 수도원의 인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인수위원단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당시 병상에 있던 마리너스 수사는 인수위원단을 만나 긴 침묵을 깨고 자신이 겪은 흥남 철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왜관 수도원 인수위원단은 고심 끝에 뉴튼 수도원의 인수를 결정했고 이틀 후 마리너스 수사는 8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왜관 수도원은 2001년 말부터 뉴튼 수도원에 10여 명의 수도사 파견하고 운영과 지원을 맡고 있다.          


  신을 믿는 이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이 신의 계획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라루 선장의 무기를 버리고 14,000명의 피난민을 택한 인류애와 아비규환의 전쟁통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고행의 가시밭을 걸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피난민들의 위대함이 신을 감동케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전쟁으로 반 토막 난 땅덩어리의 폐허를 딛고 민주주의 실현과 한류라는 한민족의 저력을 떨치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했다고 믿는다. 

  라루 선장은 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피난민을, 2001년 뉴튼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을 잇기 위한 운명이 부여된 사람이었고 그 길에 순명順命했다. 마지막으로 왜 수사가 되었냐는 질문에 라루 선장의 대답으로 흥남 철수 이야기를 끝맺고자 한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고, 말에서 떨어진 적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많은 일이 누적된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생에서 겪은 모든 경험이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는 

나의 의지를 굳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건(흥남 철수)이 내 결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1960년 크리스마스 『This Week』 마리너스 수사 기고문-          


(좌) 1950년 라루 선장,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상에서, (우) 마리너스 수사, 뉴튼 수도원 성물방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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